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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매주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시편 6편 1-3절 말씀을 인용한다. 고난 속에서 용서와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구조 분석
1-3절 회개 4-5절 간구 6-7절 탄식 8-10절 확신(반전)
[개정 개정]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강해
1-3절 회개
시편 기자는 주의 분노와 진노를 받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고 있다.(1절) 시인은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저자의 고백을 통해 본다면 저자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그 죄 값을 받고 있다. 어떠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고백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고통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떠나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는 종종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사실 자체보다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1절은 전형적인 히브리 시의 특징을 보여준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반복과 병행은 자신의 감정을 강조하려는 목적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고쳐 달라고 간구한다.(2절) 저자는 병에 걸렸을 것이다. 구약에서 죄로 인한 징계는 종종 질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난자를 누구의 죄인지 토론하기도 했다.(요 9:2) 저자는 병의 원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기에 영혼까지 떨린다고 고백한다.(3절) 그는 육신적 질병을 넘어 영혼의 고통까지 당하고 있다.
2절 역시 1절의 구조와 완전히 동일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성경에서 뼈는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또는 몸 전체를 버티게 하는 중심이 된다. 요셉의 유언에 의하면 뼈는 인간의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이다.
창세기 2장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여호수아 24장 32절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욥기 4장 14절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인용된 구절에 의하면 뼈는 사람의 전체를 지탱하게 하는 기본이며,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뼈는 곧 그 사람의 본질이자 전부이다.
4-5절 간구
간구가 이어진다. 첫 번째 간구는 '영혼'을 건져 달라는 것이며, '주의 사랑'으로 구원해 다라고 간구한다.(4절) 구원해 달라는 이유를 사망과 스올에서 주님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5절) 이러한 간구는 약간의 억지스러움이 느껴지지만, 솔직하고 정직한 기도다. 즉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나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기 위함인데 나를 죽이시면 어떻게 하나님을 뜻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간구는 억지주장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뜻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망각의 장소이다. 스올에 빠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철저히 타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며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진다. 욥기에서 스올은 변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욥기 7장 9절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6-7절 탄식
6-7절에서는 간구의 이유를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고백함으로 강화시킨다.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신다.(6절) 사실이 아닌 문학적 기법이며 과장법이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수사학적 서술이다. 얼마의 눈물을 흘려야 침상을 띄울 수 있을까? 그만큼 많은 양의 눈물을 흘린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탄식의 깊이 너무 깊다. 그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다.
7절에서는 근심으로 눈이 쇠하여졌고, 원수로 인해 어두워졌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근심하면 안력이 낮아져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욥기 17:7에서도 동일하게 고백한다. 쇠함과 어두움은 다른 표현, 같은 뜻이다. 근심과 대적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은 눈의 쇠함과 잘 어울린다. 우리도 내일이 암담할 때 '내일이 어둡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가. 현재 그는 큰 낙심 중에 있다.
8-10절 확신(반전)
8-10절까지는 반전이 일어난다. 본문 상으로만 보면 단지 몇 절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지만, 실제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탄식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라고 소리친다. 마치 두 천사가 롯에 빨리 소돔에서 떠나라는 말과 같고, 계시록에서 천사들이 바벨론에서 떠나라는 말처럼 들린다.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없다. 서로 분리되고 떠나야 한다.
이러한 확신은 기도에서 온다.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 결국 찬송가 가사처럼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라고 고백하게 된다. 9절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다고 선언한다. 이런 담대함은 믿음에서 나온다.
시편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편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5: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시편 5: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시편 5: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편 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편 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편 5: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시편 5: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시편 5: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편 5편은 ‘아침기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시편 5편 구조
1-2절 내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3-7절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
8-11절 악인에 대한 징벌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
시편 5편 히브리어
강해
1-2절 내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편 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편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인은 여호와께 호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한다. ‘나의 말’은 곧 ‘나의 심정’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표현된 ‘말’은 대화가 아니라 히브리어 ‘칼’로 ‘소리를 지르다’는 뜻이다. 부르짖는 기도를 말한다. 의역하면 ‘여호와여 저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왜 당신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습니까?’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2절에서는 ‘여호와’(1절)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호칭을 바꾼다. 다시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기도한다. 1절과 2절은 반복법을 사용하여 강조한다.
나의 말(부르짖는)에 귀를 기울이고 - 나의 심정을 헤아리소서
내가 부를 짓는 소리를 들으시고 - 내가 주께 기도합니다.
1-2절은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3-7절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
3절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것 같던 주님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확신으로 바뀝니다. 시인은 확신합니다. 자신이 아침에 일찍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시편이 아침 기도로 불리는 이유가 3절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확신하며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아침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기적을 베푸실 때는 대부분의 새벽이었습니다. 또한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4절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출애굽기 14장 27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여호수아 6장15절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시편 46장 5절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사야 58장 8절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4절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3절에서 갑자기 반전이 일어난 이유는 4절에 들어가 있는데,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악이 주와 함께 하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아니 확신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5절에서 오만한 자들에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다. 주의 목전은 원어적으로 주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6절에서는 좀더 강하게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킨다고 확신한다.
이제 시인은 주의 풍성한 사랑(חֶ֖סֶד 헤세드 7절)을 찬양한다. ‘주의 집’ 곧 ‘성전’으로 들어가 예배하기로 작정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엎드림,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에 대한 철저한 신뢰다.
8-11절 악인에 대한 징벌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
마지막 3연은 하나님의 악인에 대한 심판의 택하신 백성들의 보호로 막을 내린다. 그들을 정죄하는 방법을 주의해 보자. 구조를 보면 8절과 11-12는 의인들에 대한 복이고, 중간인 9-10절은 악인들의 저주이다. 9절 그들의 입에서는 신실함이 없다. 즉 말을 자꾸 바꾼다.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란 말은 입을 무덤의 돌로 표현하여 말만하며 그 안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뜻이다. 심중의 악과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란 말은 동일하다. 마지막 혀로는 아첨 한다는 말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거짓과 썩은 냄새, 그리고 아첨까지 모두 포괄하는 거짓의 왕들이다.
시인은 그들의 거짓과 사악한 언어를 정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10절) 해달라고 간구한다. 자신이 꾀를 내었는데, 그 꾀가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마치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처럼. 자신이 하나님보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진다.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시편 10장 2절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잠언 1장 31절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고린도전서 3장 19절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그러나’(11절)는 반전이다. 악인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기뻐’한다. 두 번이나 반복되어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더한지 말한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한다. 히브리시의 특징인 반복이 사용된다.
주께 피하는 자들은 … 기뻐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 주를 즐거워
기쁨과 즐거움이 교차한다. 이것이 주를 따르는 자들이 누리는 복이다. 12절에서 이것을 마무리 한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아멘.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편 4편 강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시편 4편의 저자는 다윗이다. 현악에 맞춘 노래로 표기되어 있다. 시편에 붙여진 제목은 히브리 원문에 있는 제목이다. 4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절 기도하는 시인
5-8절 확신하는 시인
1-4절 기도하는 시인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1절을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기도를 드림으로 시작한다. 시인이 부르는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다. 의는 공의를 뜻한다. 이 말을 다르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신다면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시오.라는 말이다.
너그럽게 했다는 표현은 부드럽게 했다.는 뜻으로 잘 대해 주었다는 말이다. 시인은 자신을 보호하신 하나님께 다시 은혜를 베풀어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러한 간청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답답함이다.
2절은 갑자기 화자가 바뀐다. '나의 영광'이란 표현을 볼 때 화자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2절은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 또는 경고이다. '어느 때까지'는 왜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짓느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짓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인간들은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한다.
-헛된 일을 좋아한다.
-거짓을 구한다.
셋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것은 결국 헛된 것이며, 그것은 거짓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것의 구체적 사실은 우상숭배다. 아래의 구절들은 이러한 해석을 옹호한다. 구약에서 우상숭배를 헛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은 적지 않다.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5-8절 확신하는 시인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의의 제사는 아벨이 드린 제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제사를 믿음의 제사로 규명한다. 의의 제사는 공의로운 제사이다. 공의로운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명을 따라 드리는 삶을 말한다. 의는 불의 반대이며, 악과 거짓의 반대이다. 의의 제사를 드리라는 말은 공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이다. 불의한 삶은 거짓말하여 타인의 것을 취하고 도둑질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가진 권력을 이용해 거짓 증인을 세워 고아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
마가복음 12: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마가복음 12: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마가복음 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은 이전처럼 거짓말하고 폭력으로 타인의 것을 훔치지 말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심을 믿고 신뢰하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이것이 진심이요 믿음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께 탄원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야?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호언장담이다. 교만한 발악이다. 시인은 이제 그러한 교만한 자들을 내버려 두지 말기를 간구하다.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는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1절의 표현과 같은 말이다. 주의 얼굴은 긍휼과 관심, 사랑을 뜻한다.
시인은 이제 확신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자신 안에 생기는 기쁨은 새 포도주에 비유한다. 새 포도주는 포도를 갓 수확하여 만든 것으로 추수의 기쁨과 즐거움을 뜻한다. 새 포도주는 알코올이 거의 없는 것으로 깊은 맛은 없으나 즐거움을 나타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그러한 기쁨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마지막 결론이다. 그는 지금 원수들에게 쫓기고 있지만 평안히 눕고 잔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호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시편은 시형식으로 기록되었다하여 '시'로 읽습니다. 시는 장이 아니라 '편'으로 읽기에 시편으로 부릅니다. 목사님들 중에 종종 시편 1장 시편 2장 으로 읽는 분이 있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시 1:1'은 시편 1편 1절로 읽어야 합니다. 시편은 모두 5권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주해되는 시편은 각 시편의 제목을 클릭하시면 주해된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곳에 사용되는 성경본문은 다른 설명이 없는 한 [개정개역4판]이며, 히브리어는 HBS이며, 헬라어는 LXX역을 사용했습니다.
주해에 도움을 받은 도서는 [시편 연구에 도움이 되는 참고도서]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아래의 세 권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을 여는 문의 역할을 한다. 6절이란 짧은 단어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며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세상 어디에 내 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시다. 1편은 놀랍게도 히브리어 첫 자인 알렙으로 시작하며 마지막 절은 히브리어 끝 자인 타우로 마친다. 인생의 시작과 끝은 알파벳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내와 나무, 열매와 쭉정이 등의 비유는 율법을 따라 사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잘 드러내주는 문학 장치이다. 1편은 지혜시에 속하면 인생의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알려 준다. 지혜는 율법(토라)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과 삶의 열매를 맺게 하며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토라송에 속한다. 15편 19편 119편은 '토라시편'에 속한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절은 감탄사로 시작한다. 한글번역을 충분히 감탄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오! 복있는 자여’로 번역하면 더 좋지 않을까. 70인역은 μακάριος로 번역하는데 이 표현은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마태복음은 시편1편의 ‘복’을 70인역에서 그대로 차용함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수 있다. 김정우는 '복이 있다'를 '어떤 사람이 이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선포하거나 서술하는 형식'이라고 말한다. 즉 감탄사로는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행복하다'로 번역하고 싶어 한다. 즉 지금 행복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시편의 시작은 서술이기보다 확고한 선언 또는 감동적인 고백이라고 본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 세 단어는 복수형태이지만 단수로 번역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악인의 복수형은 '모든 악인' 또는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세 용어와 세 단어는 반복인 동시에 점진적 상태에 대한 반복이다. 꾀(아짜트)는 모략이나 모임의 뜻이다. 여러 사람들의 말들인 것을 감안하여 임승필은 '결의'라고 했으며, 다후드는 '회집'으로 본다. 쿰란 문세어 이 단어가 '(악인과의) 교제'인 것을 감안하면 한 사람이 악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마음에 둔 상태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악한 말들, 또는 악한 사람들의 말들을 귀로 듣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둔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하여 듣고 마음에 담아 두는 행위는 다른 말들에 비해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을 의미하며, 그대로 따라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죄인의 길에 선다.는 표현은 습관을 말한다. 악인은 벌써 그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고, 이제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선다’는 표현은 ‘멈춘다’의 뜻이 아니라 ‘계속 동일한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두 번째는 특징은 악한 자들의 행위를 마음에 두고 그것을 직접 실천해 보는 것이다. 그의 모범은 악이고, 나쁜 짓들이다. 그것들이 몸에 배어 고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악을 흉내 내는 것은 악이다. 악인의 편을 드는 것도 악이다. 악에 중독된 사람들, 악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악을 좋아하고, 그것에 자신을 내 던진 사람들이다.
오만하다는 표현은 조롱하다는 뜻이다. 자리에 앉다는 말은 통치하다는 뜻이다. 루터는 자리를 ‘공적인 관직’으로 이해했다. 김정우는 ‘완성’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결국 자리에 앉다는 표현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한다. 자신이 신이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조롱한다. 즉 판단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귀를 사용하여 듣는다. 두 번째는 발을 사용하여 걷는다. 세 번째는 몸 전체를 사용하여 앉는다. 크레이키는 '인간의 성품과 행위가 타락해 가는 세 가지 단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복있는 자는 이러한 악인이 가는 길을 걷지 않는다. 그는 귀를 더러운 꾀를 들려주는 조언에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발을 악인들의 길에 걷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몸을 타인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세 가지 종류의 명칭과 동사는 점진적이며, 체화되는 과정이다. 의인은 이러한 세 동사에 대해 부정한다. 그것들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2절에서 그것을 밝힌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2절은 1절의 역전이며, 역치(易置)이다. ‘오직’은 영어의 ‘but’의 개념보다는 ‘오로지’라는 뜻이 더 어울린다.(김정우) 그는 오로지 여호와의 율법(토라)에 즐거워한다. 1절에도 분명 악인은 꾀를 듣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즐겁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2절에서 여호와의 토라를 즐거워하다고 고백한다. 그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는 즐거워할 뿐 아니라 묵상한다. 묵상하다의 ‘하가다’의 원의는 입술로 ‘중얼거리다’는 뜻이다. 율법을 읽는 것을 말하며, 반복하고 되네이는 것을 말한다. 누가 보지 않아도, 보고 있어도 그는 계속 율법을 뇌네인다. 왜냐하면 마음 깊이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반응하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기 위해서는 그가 무엇을 하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무엇을 사는데 돈을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그곳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그의 행복은 여호와의 율법을 중얼거리는 것이다.
주야는 문자적으로 밤과 낮을 말하지만 끊임없이 쉬지 않고 계속하여 묵상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면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여 그것을 그만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악인들이 악을 따르고, 행하고, 타인을 조롱할 동안 의인은 율법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데 시간을 사용한다. 이것이 그의 본심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가. 우리는 어디에 시간을 보내며 무엇에 물질과 돈을 사용하는가. 핑계댈 필요 없다.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곳이 ‘나’다.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절은 2절의 결론이다. 그는 시냇가의 심은 나무와 같다. ‘심은’의 원뜻은 옮겨 심져진 나무라는 뜻이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그 나무를 물가에 심은 것이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는 주인에 의해 포도원으로 옮겨 심겨진다. 울타리를 쳐서 보호해야 한다. 좋은 포도가 열리도록 가치 치기도하고, 북도 돋아주고, 거름도 준다. 해충도 쫓아내 준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 기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늘을 보면 언제 비가 오나 걱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물이 곁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양분과 물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강가에 뿌리 내린 성도들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세상이 아무리 기근이 와도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린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씀이 곧 생명의 강이다. 요셉을 보라. 기근이 올 때 애굽에만 양식이 쌓여 있었다. 왜 일까?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천한 요셉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생명이고, 말씀이 행복이다.
그의 잎사귀는 마르지 않는다. 마음껏 펼쳐 나간다. 가나안에서 잎은 그늘을 제공한다. 쉼을 주고 행복을 준다. 그가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한다. 물가의 나무는 걱정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다음 구절들을 통해 강은 말씀인 동시에 성령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령의 내주심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오는 갈증을 해소한다. 성령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이다. 그 물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 나온다.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 7: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단호하게 선언한다. 3절에서 의인의 형통을 이야기한 다음 악인은 절대 의인들처럼 형통하지 않다고 강하게 선언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지만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겨는 알곡이 없는 빈껍데기이다. 이곳에서 바람은 환란과 풍파이다. 어려움이 생길 때 악인은 날려 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추수할 때 곡식을 바람에 날린다. 쭉정이는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지만 알곡은 바로 발 아래로 떨어져 쌓인다. 종말에 일어날 심판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종말은 믿음으로 봐야하며, 인내로 살아가야 한다.
나무와 벼는 대비된다. 나무는 변하지 않는 영원성과 든든함을 상징한다. 그에비해 쭉정이는 작은 바람과 환란, 요동, 고난에도 쉽께 날려가 버리는 허무한 것들이다. 악인들이 기대하는 변치 않은 영원한-든든한 것이지만 그들의 생각은 왜곡되고 타락하여 허무한 것들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다 생각한다. 악인들은 결코 자신의 목적을 당성하지 못한다. 이 부분은 [성경의 상징 - 나무]를 살펴보기 바람
5절부터는 결론이다. 먼저 악인의 결말을 보여준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 겨가 날아가듯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에 날려갈 것이다. 악인들은 가볍다. 가벼움은 물리적 가벼움이 아니라 영적 가벼움이다. 영적 가벼움은 가치 없음이며, 삶의 무의미다. 혼란의 폭풍이 불 때 말씀으로 채워진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어떤가? 무겁지 않고 가치 없고 무의미하다. 그들은 바람이 불 때 멀리 날려 간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나갈 것이다. '견디지 못한다'는 말에 좀더 주목해 보면, 심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심판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에도 여호와하나님을 나의 반석, 요새, 피할 바위, 산성이라고 표현한 곳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심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진정으로 복된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삼은 자들이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44:2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에게 친히 '나는 너의 방패'라고 소개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는 자들이 가장 복된 자들이다. 그 누구도 그들을 공격할 수 없다.
창세기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의인들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곳이며, 신약적으로 말하면 교회이다. 악인들은 하나님 밖에 거할 것이며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품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임에 참석할 것이다. 모임은 총회를 뜻하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6절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은 5절의 대한 결론이자 1편의 결론이다. 저자는 의인의 승리 또는 악인의 패망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시제를 주의해보자.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포로적 상황에서 시편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유의하자. 길은 사람이 다는 길이 있는 것처럼 습관 방법, 생각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열왕기 기자는 여로보암의 길이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다고 선언한다. 여로보암의 길은 여호와께 제사해야 함에도 우상 특히 황금 송아지에게 제사하게 하고,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평민 중에서 뇌물을 바친 자에게 그 일을 맡겼다. 우상과 악으로 점철된 거짓된 삶의 방식이 바로 여로보암의 길이다.
열왕기상 15: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열왕기상 16: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반면 하나님을 기쁘게한 '다윗의 길'도 있다. 다윗이 생애 중에 잘못도하고 실수도 했지만 다윗의 최고우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는 항상 모든 삶의 기준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길로 행한 이들에게 복을 주셨다.
열왕기하 22: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역대하 17: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역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의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악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제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이제 시편의 문이 열렸다. 의인들은 흥황할 것이나 악인들은 멸명할 것이다.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3편이 아침기도라면 4편은 저녁기도입니다. 원수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단잠을 잘 수 있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곤경 속에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평안히 살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1-2절 많은 원수와 탄식
수많은 원수가 시인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어찌나 많은 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의 애적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1절)는 가신의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말합니다. 시인은 1.2절에서 ‘나의 대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기를 봐도 대적이고, 저기를 봐도 대적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토하게 합니다. ‘어찌’(1절) 그리 많은지.
대적들은 수근거립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즉 그는 하나님이 버린 자이다. 란 뜻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난처한 상황에 놓인 듯합니다.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 있는 시인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표제어처럼 지금 상황이 압살롬에게 피할 때라면 다윗을 싫어했던 대적들일 겁니다. 다윗이 망하기만을 기대했던 이들입니다. 김정우는 1절의 ‘나의 대적’과 ‘나를 치려는 자’과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친다’는 표현의 단어는 법정에서도 사용되며, 군사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말로 대적하고, 행동으로 대적하고 있음을 말합니다.(김정우) 그들은 다윗의 쫓겨감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절) 표현은 악의적이며, 결국 망하게 될 것을 확신하는 고백입니다.
2. 3-4절 방패이신 하나님
그러나 다윗은 담대하게 여호와를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로 고백합니다.(3절) 방패는 보호를 말하며, 영광은 평판과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머리를 들게 한다는 표현 역시 회복을 말합니다. 다윗은 사람들은 자신을 대적하고 넘어뜨리려 하지만 하나님만은 보호하실 것이며 결국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분임을 고백합니다.(4절) ‘성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그곳은 단순히 물리적 장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곳입니다.
3. 5-6절 단잠 자는 고백자
여호와에 대한 신뢰는 곧바로 평안한 잠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은 과감하게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5절)이라 고백합니다. 참으로 다윗의 고백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원수들이 목숨을 노리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위협과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한다면 결코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언제나 초초하고 걱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없다면 신경 쇠약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천만인’(6절)은 셀수 없이 많은 적들을 뜻합니다. 비록 그렇게 많은 적들이 있다 해도 자신은 두렵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붙드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4. 7-8절 구원은 여호와께
‘여호와여 일어나소서’(7절) 전쟁 용어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장(戰場)에 나갈 때 하나님을 부르는 공동체적 호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싸우실 것을 요청하며, 신뢰하고 있습니다. 뺨을 치는 행위는 모욕하는 것이며 완전한 승리를 말합니다. ‘이’는 힘과 능력의 상징으로 이가 꺾이는 것은 모든 힘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대신하여 원수들과 싸워 이겨주실 것을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