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묵상] 6. 따라가시는 여호와
[시편 23편 묵상] 6. 따라가시는 여호와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따라가시는 여호와
목자는 앞서갑니다. 절대 뒤에서 양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양과 염소의 다른 점이 있는데, 양들은 목자를 따르지만 염소는 목자 앞서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6절에서는 양의 뒤를 따르는 목자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앞서가십니다. 절대 뒤따라가지 않습니다. 성경 수많은 곳에서 여호와는 앞서가십니다. 여호와께서 앞서가시는 이미지는 보호와 인도하심, 또는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양 떼를 이끌고 산과 계곡을 건너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앞서가시는 하나님’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출애굽기 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신명기 1: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신명기 31: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시편 68:7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이사야 45:2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미가 2: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앞서가시는 하나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앞서 가심, 즉 먼저 가심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길이 험하기 때문에 먼저 가시고, 길을 모르기 때문에 먼저 가십니다. 또한 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먼저 가십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속량과 대속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곳은 출애굽 때와 포로 귀한 때입니다. 철저한 인간의 무력함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구원하십니다.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전파’는 이 사실을 온 천하에 전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만이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왔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두려움과 불안의 터널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볼 수 없는 흑암의 사람들에게 찾아오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앞장서서 너희 앞에 걸어갈 터이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12절)고 하십니다. 우리의 가는 길의 앞뒤로 호위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실 분이 있으니 걱정 근심을 내려놓고 앞서 행하시는 그분을 따라가라는 촉구입니다.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히 지금 있는 곳에서 일어서십시오.]
-출처: 무지개성서교실 ("앞서가시는 하나님" (이사야서 큐티 86))
1-5절까지의 이미지는 인도하시는 여호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 절에서 다윗은 ‘따라가시는 여호와’의 이미지로 전화시킵니다. 엄밀하게 여호와께서 다윗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른다는 말은 곧 여호와께서 따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가시는 여호와가 구원과 대속의 이미지라면 ‘따라가시는 여호와’는 무슨 의미일까요? 케네스 E. 베일리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990년대 후가, 그가 그리스를 방문 중일 때 젊은 시절 목동이었던 택시기사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목동이던 시절 양을 풀밭에 방목해 놓고 깜빡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일어나 보니 한 마리의 양도 보이지 않아 깜짝 놀라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걱정하며 양들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양들은 자신이 집 근처, 그러니까 양들의 우리가 있는 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언제나 그 시간이 되면 자신이 돌아가야 할 할 집을 향해 걸었던 것입니다.
‘따른다’는 말에는 양이 어디론가 간다는 말입니다. 양들이 움직일 때 목자는 앞서갑니다. 그런데 약한 양이나 어린 양은 가끔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뒤처집니다. 이럴 때 늑대 같은 들짐승들이 노리고 있다가 덮칩니다. 이럴 때 조수가 양 떼의 뒤를 따릅니다.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수가 없다면 개가 양 떼의 뒤를 따릅니다. 개는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면서 양들이 무리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만듭니다. 목자는 앞서기도 하지만 뒤따라 감으로 양들을 보호하고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김정우는 '따른다'라는 동사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의와 인자함을 추구하다’(잠 21:21), ‘평화(샬롬)을 구하다’(시 34:14) ‘선을 추구하다’(시 38:21)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뒤따라가다, 뒤쫓아 가다, 뒤좇다, 가까이 시중하다, 박해하다, 괴롭히다, 안정하도록 뒤따르다’는 의미를 가진다.(BDB)] -출처 :김정우 <시편 주석 Ⅰ> 545쪽
따른다는 단지 수동적으로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형사가 범인의 뒤를 쫓듯 좇아가는 것이며, 어떤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양 떼의 뒤를 따르는 조수나 개들은 온 집중을 양들에게 쏟습니다. 혹시 뒤처지거나 낙오되는 양들이 없는가 살피는 것입니다. 또한 뒤에서 급습하는 짐승들을 주의하여 보면서 양들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생활을 사랑의 눈으로 보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조금도 늦추어지는 일이 없이 나를 따르고 있는 동안 주님은 나를 계속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을 뿐 아니라 역시 주님에게도 기쁨으로 드린 동일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깊은 절망과 나락을 떨어질 때, 심각한 고난과 아픔으로 인해 일어설 힘이 없을 때 찾아오십니다. 도무지 무리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무너질 때 주님은 뒤에서 나를 지켜봐 주시고 괜찮다고 다독거려 주십니다. 다윗이 생애를 생각해 봅시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의 사위가 되었어도 쫓겨 다니는 운명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밧세바와의 사건으로 아들 압살롬에게 맨발로 쫓겨 달아나야 했습니다. 시편 23편의 배경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반석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
선하심은 ‘토브’라는 단어인데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좋다’라는 말이 히브리어 토브입니다. 토브는 ‘좋다’ ‘선하다’ ‘완전하다’ ‘평안’ 등의 의미로 번역됩니다. ‘인자’는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인 ‘헤세드’입니다. 호세아서의 핵심 단어이며 주제인 헤세드는 ‘인애’ ‘긍휼’ ‘사랑’ ‘자비’ 등으로 번역됩니다. 헤세드는 ‘언약 안에서의 신실함’을 뜻합니다. 헤세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약속의 성취들을 이야기할 때 사용합니다.
다윗은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고, 원수의 목전에 있습니다. 진실로 사망과 한 걸음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렵고 힘이 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의심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 기뻐할 수 있고, 찬양하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 대한 베일리의 해석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다윗이 그의 삶 전체에 걸쳐 모든 두려움과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왔으며, 자신을 뒤따라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자격이 없는 그에게 언약적 신실함으로 지원하시는 동시에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선한 목자, 86쪽)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귀향은 인류의 신화와 전설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얼마 전 물금역(경남 양산)에 갔는데 그곳에 망향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역 앞에 도시화되면서 고향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거나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에 입주했습니다. 시골이었던 그곳은 과거의 흔적을 하나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땅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기억을 담아둘 건물은 모두 철거되고 사라졌습니다. 고향은 인간의 영원한 nostalgia입니다.
조국을 떠나 살아가는 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다윗은 다시 돌아갈 집을 상상합니다. 그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입니다. 곧 성전입니다. 성전에 대한 그리움은 예배에 대한 기대,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회복입니다. 고향은 정신적인 공간으로 환원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고향은 정신적인 공간이기 전에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곳’입니다. 우리는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고향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기억이 고향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태어나고 자란 곳은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고향은 ‘쉼’을 주는 곳입니다.
필립 켈러는 집에 대한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차가운 비바람과 더불어 겨울이 다가오면 이웃 목장의 병약한 양들이 울타리로 모여들어 우리 양들이 잘 자라고 있는 이쪽의 비옥한 농장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무심하고 무정한 주인의 사육을 받고 있는 이 가련하고 초라한 짐승들은 일 년 내내 고생 밖에 몰랐습니다. 저들은 초목이 무성한 여름 한 철에도 굶주림으로 시달렸습니다. 저들은 질병과 옴과 기생충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여윌 대로 여위었습니다.]
양의 입장에서 집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제공해 주는 ‘목자’입니다. 사랑과 관심, 수고와 애씀으로 양들을 위해 일하는 목자가 있는 곳입니다. 김정우는 ‘거한다’는 표현은 맛소라 본문에 의거해 ‘돌아간다’가 더 정확하고 말합니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성전에 예배드리고 싶지만 드릴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누구입니까?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폭력과 착취로 인해 절망스러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는 상황 속에서 완전한 이상향과 돌아갈 집을 그리워합니다. 그리움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확신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6절을 읽고 다시 1절로 되돌아가 보면 그곳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평온하고 행복한 곳, 그곳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던 ‘선한 목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갈 집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고통스러운 영적 여행을 떠났던 어거스틴은 회심한 후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향, 온 인류의 고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고향을 떠나 방황했던 사람들이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이 자신들의 돌아갈 ‘집’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애굽을 떠났고, 유월절을 지켰고, 홍해를 건넜으며,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피터 크레이키는 ‘이 시편에서 출애굽의 메아리는 양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린 목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속의 메아리로 바뀐다.’(요 10:11)고 말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편 23편>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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