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롯(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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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롯(Lot)

1. 롯에 대한 일반적인 개요

롯은 아브라함의 형제 하란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갈 때 조카인 롯을 데리고 함께 갔다. 애굽에서 올라온 후 아브라함과 결별한 후 소돔 성에 거하다. 후에 소돔이 멸망할 때 모든 재산을 잃고 홀몸으로 빠져나온다. 두 딸과 관계를 맺고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된다. 롯은 믿음은 있지만 세상을 버리지 못한 세속적 성도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2. 롯의 생애

롯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1장 셈의 족보이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는다.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고향(우르)에서 죽는다. 하란의 아들인 롯은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아브람과 함께 지낸 듯 보인다. 어쩌면 롯은 어릴 때부터 아브람의 수하에서 아들처럼 자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여튼 데라는 가족들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주한다. 하란에서 나홀은 정착하게 되고, 데라는 죽음을 맞이한다. 하란에 있을 때 아브람은 제2차 소명을 받은 듯하다. 모든 것을 정리해서 가나안으로 향한다. 이때 조카 롯도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온다. 정황상 롯은 적은 나이는 아닌듯하다. 아브람이 75세라면 롯은 적어도 20살은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나안이 기근이 들어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롯도 함께 내려간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올라올 때 함께 올라온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롯도 사래로 인해 아브람이 가축을 선물 받을 때 많은 가축을 함께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니 아브람과 롯은 가축이 많아져 함께 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 서로 떨어져 지내자고 한다. 롯은 요단들을 선택하고 떠난다. 아브람은 그대로 헤브론 산지에 남는다. 요단을 향해 롯을 발길을 옮길 때 성경은 의미심장한 표현을 한다.

  •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악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아브람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싸우다


이 구절은 앞으로 롯의 운명을 예지한다. 롯은 요단들에서 지내다 장막을 옮겨 결국 ‘소돔까지’(창 13:12) 들어간다. 결국 소돔은 롯의 정신이자 마음 깊이 들어가 있는 갈망의 표지(標紙)인 셈이다. 그 후 하필 가나안 전쟁이 일어난다.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이 소돔의 연합군을 공격한 것이다. 그 일로 롯은 함께 포로로 끌려간다. 아브람으로 인해 롯을 구출된다. 하지만 롯은 아브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시 소돔으로 들어간다. 아브람은 소돔에서 나오지 못한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롯은 소돔에 들어가 결혼한 듯 보인다. 이때쯤 두 딸을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19장에서 딸들이 장성한 상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8장의 아브라함은 99세다. 그렇다면 14장에서 아브라함은 80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즉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19장에서 롯의 딸들은 성인이 될 수 있다. [롯의 아내는 아래에서 따로 다룬다]


14장에서 적어도 15년 이상 지나 아브라함이 99세 때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한다. 그동안 롯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고 곧바로 창세기 19장 소돔의 멸망 이야기로 넘어간다. 결국 소돔이 멸망할 때 두 천사가 롯을 찾아와 도망가라 명한다. 롯은 사위들에게도 가자고 하지만 농담으로 여기고 가지 않는다. 결국 롯은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소돔을 빠져 나온다. 중간에 롯의 처는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된다. 산으로 도망친 롯의 가족은 두 딸이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성..하여 아이를 낳는다. 이들은 후에 모암과 암몬의 조상이 된다. 그렇게 롯의 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성경에서 사라진다.


소돔에서의 롯의 생활


소돔으로 돌아간 롯은 어떻게 살았을까? 소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두 천사가 찾아올 때 롯이 나가서 소돔 사람들을 말릴 때 소돔 사람들은 롯을 향해 ‘이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창 19:9)라며 위협하기 때문이다. 롯은 최대한 소돔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소돔 사람들은 결코 롯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롯의 신앙은 어떤가?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답게 믿음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 천사가 찾아왔을 때 아브라함처럼 성문에 앉아 있다 나그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환대하려 했다. 이것은 롯이 소돔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드로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 베드로후서 2장 7절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하지만 롯은 신앙은 가졌지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세상도 가지려 했다. 한 발은 하나님께, 한 발은 세상에 두었던 인물이었다. 결국 롯은 세상도 얻지 못하고, 믿음도 지키지 못한 실패자가 된 것이다. 결국 소돔이 멸망할 때 모은 모든 재산을 잃고 홀몸으로 도망쳐야 했다.

소돔에서 도망치는 롯과 두 딸


롯의 아내와 딸들


롯은 언제 결혼한 것일까? 필자기 보기에 롯은 아브람과 결별하고 소돔으로 옮겨 갈 때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롯의 아내는 소돔의 여자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소돔 사람인 롯의 처는 철저히 세속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소돔이 멸망할 때 소돔에 남겨진 자신의 재산과 모든 것들이 아까워 뒤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롯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주님은 세속적인 그녀를 이렇게 경고하신다.

  • 눅 17: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인가?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주는 경고가 바로 롯의 처다. 버려질 세상에 미려는 두는 자들은 세상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할 것이라 경고하신다. 롯의 두 딸들 역시 지극히 세속적인 존재들이다. 그녀들은 소돔에서 도망쳐 나와 동굴에 거할 때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롯은 왜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너무나 염치가 없어서 그런 걸까?

 

결론: 너무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롯을 정의해 본다면 너무나 세족적인 그리스도인이라할 수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세상을 끊어내지 못한 상태로 한 발은아직 세상에, 한 발은 하나님께 두는 고통스러운 삶의 양태를 가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롯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체 비운의 삶으로 막을 내립니다. 여호수아처럼 우상을 택하든지 하나님을 택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 인물 시대별 목록표

성경 인물 시대별 목록표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을 시대별로 정리합니다. [ ]안에 표시된 인물은 <성경 인물 (구약) (신약)>에 올린 것들입니다. 필요에 따라 PDF 파일을 첨부하였으니 다운로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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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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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이삭


이삭은 구약의 인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백세 낳은 아들이다. 리브가와 결혼하여 야곱과 에서를 낳았다. 이삭의 구체적인 생애와 믿음을 알아보자.

 

1. 이삭의 간략한 생애


성경에 이삭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7장 19절이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모양으로 나타나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이삭의 출생을 알린다.


창세기 17장 1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을 때 출생한다. 25년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이며, 나이가 백세가 넘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 자체보다는 사라가 불임이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이후 후처인 그두라를 얻어 다른 자녀들을 낳기 때문이다.


이후 이삭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특히 사라에게 있어서 이삭은 거의 자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도한 이삭에 대한 집착은 후에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내게 된다. 이러한 사라가 이삭을 대하는 태도는 후에 이삭을 고집스러운 존재로 만드는데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삭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다. 물론 드리지 않고 숫양을 대신드리지만 당시 이삭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트라우마가 절대 작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사라는 어떠했을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라를 죽음을 맞이하고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을 한다.


리브가도 불임이었다. 성경은 짤막한 한 구절로 끝나지만 그 기간이 무려 20년이다. 이삭은 40세에 결혼을 했고(창 25:20), 에서와 야곱을 낳은 대가 육십 세였다.(창 25:26) 이후 이사고가 야곱의 생애가 겹친다. 성경은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이삭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로 속이는 사건을 소개한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했던 잘못과 거의 동일하다. 하여튼 성경은 이삭이 그 해 농사를 지어 백배를 얻었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이삭이 판 우물을 메워 버린다.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다시 우물을 파고 다시 메우기를 반복한다. 마지막 판 우물은 메우지 않자 그곳 이름을 르호봇이라 한다. 이후 브엘세바로 가서 다시 우물을 파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은 이삭을 축복한다.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 귀스타브 도레


이삭이 나이가 들어 장자인 에서를 축복하려고 사냥하여 음식을 만들어 오라 한다. 리브가가 그 고식을 듣고 야곱을 꼬듣겨 대신 들어가게 한다. 이삭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고 음성은 야곱이나 피부는 에서라 생각하여 축복한다. 나중에 에서가 오지만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야곱을 죽이려 한다. 리브가는 에서의 소리를 듣고 하란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결국 야곱은 이삭의 기도를 받고 하란으로 이동한다. 이후 이삭은 성경에서 죽음까지 사라진다. 하란에서 20년을 보낸 야곱은 가난으로 돌아온 후 에서와 화해한다. 하지만 이삭을 찾지 않고 세겜에 거하다 디나가 강간을 당하면서 위기를 맞이한다. 결국 그 일로 벧엘로 올라가고, 벧엘에서 에브랏(베들레헴)으로 오는 길에 라헬이 죽는다. 야곱은 이삭이 거하던 기럇아르바(헤브론)에 도착한다. 이삭은 18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2. 이삭의 믿음


이삭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사이를 잇는 가교이다. 창세기 안에서 이삭은 특별한  존재가로 부각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인내 가운데 얻은 아들이지만, 이삭 자체로는 특별히 강조할 것이 없다. 이삭은 아브라함을 닮은 듯 다르다.


이삭은 믿음의 사람이다.

이삭이 믿음의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단적으로 리브가가 불임일 때 20년을 기도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녀들을 축복했다. 
히브리서 11장 20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은 고집쟁이였다.

리브가는 태중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신다.(창 25:23)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야곱이 에서에게 행한 것들을 보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삭은 리브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의 예언이라고 해도 이삭은 장자인 에서가 좋았다. 그는 에서가 사냥해서 해오는 음식이 좋았던 것이다. 에서가 장자 권을 판 것도 알고, 리브가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이삭은 자신이 늙자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 한다. 여기서 리브기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야곱을 들여보낸 것이다.

 

 

 

성경 인물 시대별 목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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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Corneli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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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Cornelilus)

뜻 : 뿔

1) 가이사랴에 주둔한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 (행 10:1).
2) 아마 로마인이었을 것이며 유대인과 친근한 사이였다 (행 10:22)
3) 베드로를 통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을 받았다 (행 10장)

 

가이사랴는 로마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위한 로마 군인의 주둔지였다. 이곳에는 황제숭배 사상이 발달되어 있으며, 갖은 우상들이 많은 곳이다.

 

당시 로마군인은 현대의 군인과는 차원이 다른 권력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당시 백부장의 권력은 한국의 육군 대대장 정도급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이방인으로 유대인의 율법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종교를 고상하게 여긴 이들은 종종 유대교로 들어갔다. 고넬료도 그 중 한 명이다.

 

고넬료 환상을 보다

사도행전 10장이 시작되면 고넬료가 등장한다. 누가는 그가 경건하며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서술한다. 더불어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한다.(행 10:1-2) 그가 제 구 시쯤 기도하다 환상을 본다.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당시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다. 고넬료는 하인과 부하 중에서 경건한 자를 불러 욥바로 보낸다.

  • 행 10:5-7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베드로 환상을 보다

고넬료의 종들이 욥바에 거의 도착 할 때 베드로는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본다. 환상의 내용은 부정한 것들이 보자기에 쌓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잡을 먹으라 하신다. 베드로는 율법으로 부정한 것은 먹지 않는다 말하며 거절한다. 이것이 세 번 이어진다. 부정한 동물들은 이방인을 뜻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아는 하나님으로 실제의 하나님을 제안하고 거절한다. 베드로의 거절은 보수적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율법의 사람이었다. 사도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편주의를 추구하는 신약의 복음에 베드로는 협소하고 편엽했다. 베드로가 왜 사도행전 중반 이후 거의 나타나지 않는지는 그의 성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성령의 뜻을 다른다.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0: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고넬료의 가족이 성령을 받다

고넬료이 종들이 베드로를 만나 자초지정을 이야기 한다.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로 올라간다. 고넬료는 베드로는 보자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린다.(행 10:25) 신분상 고넬료는 뛰어난 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에게 자기를 낮추는 자였다. 또한 그는 베드로가 올것을 기대하며 그의 친적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행 10:24)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한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성령이 그 집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한 가족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첫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율법과 성령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때 베드로는 

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15: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고넬료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된 공식적인 그리고 의미있는 존재였다. 고넬료 사건은 복음이 혈통을 너머 모든 민족들에게도 전파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다. 구원은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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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Pontius Pil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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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 본디오 빌라도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총독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이다.


이름
본디오 빌라도
라티어: Pontius Pilatus
기원후 26-36년 재임


본디오 빌라도는 성경에 나오는 횟수가 극히 적음에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처형시킨 장본인이자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폰티우스는 다섯번째라는 삼니움(Samnium)의 부족 중 하나이다. 삼니움은 고대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지역이다. 기원전 4세기 경 로마와 견줄 정도래 로마 하부 지역의 강자였다. 하지만 여러번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기원저 82년에 로마의 독재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완전히 힘을 상실하여 로마에 편입된다. 

본디오 빌라도는 교활하고 포악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예수님을 처형할 때 정점을 찍는다. 그는 갈릴리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다.


총독으로서의 빌라도


빌라도의 본군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아 요새이며, 본군의 일부만 있다. 가이사랴에는 120명 정도의 기병대와 3000명 정도의 보병이 머물렀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가이사랴에 머물다 유월절 등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예루살렘 치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예수님의 처형 당시는 본문이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 때이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을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가 갖던 사형 집행권을 로마가 다시 뺏어가 총독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또한 대제사장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제사장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전통에 의해 뽑힌 대제사장이며, 다른 한 명은 로마에 돈을 주고 로마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제사장이다. 성경은 이런 이유로 '대제사장들'이란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

1세기 초에는 산헤드린이 유대지역의 대부분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이양 받은 상태였지만 몇 번에 걸친 반란은 그들의 권위를 떨어뜨렸고, 예수님 사형 집행 당시에는 사법권이 자체가 힘이 없었다. 총독은 산헤드린이 결정한 것도 상당부분 수정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성전과 성전의 돈을 통제했고, 대제사장의 의복도 보관하다 절기때만 내주었다고 한다.

 

성경 속의 빌라도

포악한 살인자

빌라도는 매우 포악한 자였다. 물론 당시 로마 총독들이 대부분 그런 성향이 있었지만 빌라도는 도가 지나쳤다. 그는 갈릴리가 반역의 주거지인 것을 알고 반란의 조짐이 보이자 갈릴리 사람들이 모여 제사할 때 공격하여 그들을 몰살 시켰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한 경고의 예로 등장한다.

누가복음 13:1-2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헤롯과 적대적인 관계

누가복음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예수님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눅 23:13-16
23: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23: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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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신약편] 막달라 마리아(Μαρία ἡ Μαγδαλην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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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신약편] 막달라 마리아(Μαρία ἡ Μαγδαληνή)

1. 이름


Μαρία ἡ Μαγδαληνή

막달라 마리아(개신교)
마리아 막달레나(가톨릭)
Sancta Maria Magdalena


2. 개요


고향은 갈릴리 막달라(Magdala)이다.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출신을 넣어 막달라 마리아라 부른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 봤을 뿐 아니라 어떤 마리아와 함께 부활 후 첫날 무덤에 찾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그녀의 직업이 '창녀'로 알려져 회개한 성녀라고 불려왔지만 상당히 왜곡된 지식이다.

 

 

3. 막달라 출신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인 막달라는 갈릴리 서부 연안이다.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해 있었다. 당시 염색업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며 염색된 천은 고가에 팔려 나갔다. 이 때문에 막달라는 굉장한 부를 가진 마을이었고, 그로인해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소개하는 곳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7귀신이 있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을 쫓아내 주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치료해준 예수님이 감사하여 그 후 따라 다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그곳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또한 안식 후 첫날 부활 때도 다른 마리아와 함께 무덤을 찾아갔다.  그들은 곧바로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으나 믿지 않았다. 

 

 

4. 나그함마다 사본


<막달라 여자 마리아 복음서>
<토마스 복음서>
<필립보 복음서>
<가룟 유다 복음서> 등에서 등장한다. 느가함마디 사본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분판의 문헌들이다.

중세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결혼했다는 기괴한 전설을 만들기도 한다.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번져 나갔다. 이러한 견해를 정리 만든 것이 <다빈치 코드> <예수의 마지막 유혹>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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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도마(T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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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도마(Tomas)

성경에서 도마처럼 기묘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일반인들은 도마를 언급하면 ‘의심’이란 단어를 연상한다. 도마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하나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제자로 인식된다. 

헬라식 이름으로는 디두모(요 11:16)이다. 도마라는 이름의 뜻은 '쌍둥이'이다. 도마가 예수님께 어떤 방식으로 언제 부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열정적 신앙의 소유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였다. 공관복음에서 도마는 12제자 중의 한 명으로만 소개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독특한 존재로 소개된다. 도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으로 통해서 접근해야 옳다. 물론 후대에 기록되었고, 요한의 관점이 지배한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이 소개된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가지 않고 그곳에 이틀을 더 유한다. 그러고 갑자기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요 11:7)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반대한다.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는데 왜 다시 가려는가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에 이렇게 답하신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사실 이 말은 굉장히 난해하다.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 빛 안에 거할 때 실족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쨌든 예수님은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신다. 제자들은 다시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깨어날 것이니 굳이 유대로 갈 필요가 있느냐 반문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심정도 의도도 알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유대로 가서 위기에 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 긴장하고 있다. 바로 이때 도마가 말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문맥상 보면 이 말은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우리도 가야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도마는 유대로 내려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다. 격정과 열정, 두려움과 공포가 어우러진 기묘한 표현이다. 그는 지금 마음이 혼란하다. 도마에게 없는 것은 ‘믿음’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직 이해가 없다. 그렇기에 제자로서 선생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그 결의 또한 확신이 아닌 절망적 회의다.

2. 믿지 못하겠노라

요한이 도마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은 요한복음 20장이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요 20:19)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방문하신다. 길게 숨을 내쉰다면 ‘성령을 받으라’ 명령하시고 평강을 전하신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곳에 도무가 없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전하자 도마는 대뜸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도마가 말하려는 요지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많은 이들이 ‘의심’을 말한다.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다. 도마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의 신앙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의 신앙은 ‘경험된 범주’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의 이성과 인지 능력을 초월한 신적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님은 단호하다. ‘네가 경험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면 좋다. 경험해 보라.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이 말은 도마의 경험적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향을 인정하시고, 그 성향을 통해 갖는 믿음을 응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초월적 경험을 통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지성적 작용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믿는 자가 되라’는 권면 속에 담겨 있다. 그렇다!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도마의 고백은 놀랍다. 그는 곧바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Ὁ Κύριό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도마의 믿음은 비약한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현실주의적 차가운 이성의 신앙이 깨지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다. 믿음은 도약이다. 초월적 존재를 경험함으로 현실로부터 초월하는 신앙을 갖게 된다.

결론

도마를 의심하거나 회의적 존재로만 그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도마는 최선의 사람이다. 그는 믿음을 경험적으로 갖고자 했다. 예수님은 도마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믿음을 갖지 못한다. 믿음은 초월적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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