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편 23편 묵상] 4. 보호하시는 여호와

샤마임 2018. 4. 2.
반응형

[시편 23편 묵상] 4. 보호하시는 여호와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피할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양들은 한 곳에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풀은 양들이 원하는 만큼 빠르게 자라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여름이 되면 산언덕으로 돌라가야 합니다. 중간에 계곡과 골짜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하는데 하필, 그 중간에 고난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험악한 광야의 길과 같습니다. 피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4절은 으로 시작합니다. 놀라움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직역한 NASV감을’ ‘even’으로 해석하여 놀라운 느낌을 살리려 했습니다. 느낌을 살려 번역해 본다면, ‘이럴 수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다니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름답고 화사한 날씨가 이어지다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런 흠뻑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곳은 실제로 죽음의 계곡입니다. 케네스 E. 베일리는 1957년 여름의 사건을 떠올립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건기가 우기가 구분되어 있지만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페트라로 이어지는 통로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계곡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이 계곡을 지나던 50여 명의 프랑스 관광객들이 이 홍수로 익사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계곡을 지날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동반합니다. 돌발적인 폭우뿐 아니라 그 계곡에는 종종 강도들이 출몰합니다. 베일리는 람사(Lamsa)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죽음의 그림자 골짜기란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깊은 협곡들이 있는 산 사이로 바람이 부는 길들을 말한다. 행인들은 강도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 길을 빠져나와야 한다. 죽음의 공포가 끊임없이 그들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곤경과 죽음에 촉각을 세우고 떨면서 그 길을 지난다.”

죽음의 계곡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회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 길만을 지나야 합니다. 그 길을 지나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방에 죽음과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4절을 시작하면 그렇다 난 지금 계곡을 걷고 있다고 고백한 내용은 사실을 기술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일어나는 수많은 두려움과 공포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배적 관적에서 시편 23편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삶은 본질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평온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 위협들로 인해 파괴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대비해도 피할 수 없고, 대비한다고 해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압살롬의 반역 때 맨발로 도망갈 때나, 사울에 끊임없이 쫓아올 때 다윗은 언제나 죽음을 친구 삼았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위로하러 왔을 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 20:3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다윗은 자신의 주변에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낍니다. 복병(伏兵)처럼 죽음이 다윗 주변에 매복하고 있습니다 칼을 뽑아들고 쫓아올 것 같은 것입니다. 김정우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해석하면서 난색을 표합니다. 이 표현은 아주 어렵고, 어둠과 죽음이란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봅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이것은 '죽음의 어둠의 골짜기'이다. 여기의 죽음은 최상급으로 '완전한 어둠' '철저한 어둠'을 뜻한다.]

철저한 어둠, 빛이 전혀 없는 어둠입니다. 빛은 희망이자 위로입니다. 절망 그 자체인 곳을 다윗은 아무런 해도 없이 걷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으며 외칩니다. ‘내가 이곳을 걷고 있다. 내가 아무런 해가 없다. 난 지금 안전하다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나고 있다는 감탄입니다. 사람들은 공포의 계곡을 걸을 때 계곡 자체가 아닌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이 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음의 추위

김겸섭목사의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는 마신다>에 보면 '마음의 추위'(The Cold within)는 제임스 패트릭 키니의 시에 대한 글이 나옵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섯 사람이 춥고 어두운 곳에 갇혀 모닥불을 쬐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모닥불이 꺼져 가면서 추위가 엄습한다. 그들 손에는 지팡이가 하나씩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여자이다. 다른 남자들이 지팡이를 내놓아야 한다며 꼭 움켜쥐었고, 특히 흑인을 위해 지팡이를 장작으로 내놓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두 번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곳은 교회가 아니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사람은 옷이 남루한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속으로 부자를 위해 왜 내가 희생해야 해? 그건 어림없는 일이지 하며 중얼거린다.

네 번째 사람은 부자였다. 그는 자기의 재산에 골몰하느라 지금 이 위기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다섯 번째 사람은 흑인이다. 이 기회에 자신을 무시한 백인들에게 단단히 앙갚음을 하리라 다짐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체한다. 마지막 사람, 그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있는데 왜 나만지팡이를 내놓아야 하냐며 자신도 침묵한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밤이 깊어 갈수록 추위도 무섭게 엄습한다. 아무도 지팡이를 움켜쥐고 내어 놓지 않는다. 불이 커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날 밤, 모두 얼어 죽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인가? 죽음의 이유가 추위였을까? 아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마음의 추위였다. 아무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을 죽였다. 이 죽음의 실체는 타살이 아니라 자실이다. 가장 무서운 추위는 마음속에 있다.]

이기심이 마음의 추위이지만, 이타심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낄 때야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신다

다윗은 다시 고백합니다. ‘나는 두렵지 않다. 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기 때문이다마음의 추위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대한 신뢰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 됨을 인정할 때 마음의 추위는 사라집니다. 김정우는 3인칭(2-3)으로 불렀던 여호와를 이제 2인칭(4-5)으로 전화 시키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있는 것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여호와를 로만 머물지 않고 당신이란 2인칭으로 부릅니다. 2인칭은 우리가 되고, 서로가 영향력을 주고받는 친구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2인칭은 곧 공동체을 말합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로변화되는 순간이며, 객관적 지식이 나를 살리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계신다 한들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안다 해도 그것이 나를 살리지 못합니다. 나를 살리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구원이 일어납니다. 신앙은 객관적이면서 동시 주관적입니다. 탁월한 신학적 지식이나 능력이 구원하지 못합니다. 금식과 봉사조차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부를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지팡이와 막대기를 적으로부터 보호하면서 동시에 양들을 훈련시킵니다. 필립 켈러는 막대기의 기능을 몇 가지 알려 줍니다. 막대기는 철저히 개인의 것입니다. 목자 자신에게 딱 맞는 막대기를 직접 구해 깎아서 손에 쥡니다. 막대는 먼저는 목자 자신을 보호합니다. 또한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짐승들이 양들을 해치려 할 때 목자는 막대기를 집어던져 쫓아냅니다. 다윗의 물매를 연습하듯 목자들은 끊임없이 막대기 던지는 연습을 통해 일격을 가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막대기 끝에 철퇴와 같은 금속이 붙어 있어 동물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고집스러운 양들을 징계하고 훈련시키는데 사용합니다.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먹지 말라는 독초를 먹을 때 막대로 양들을 때리거나 집어던져 고통을 줍니다. 그럼 양들은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막대기는 양을 헤아리는 곳에도 사용합니다. 20:37에는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로 기록하는데 이것은 구원과 보호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심판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20:36-38)

헤아린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고,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나쁜 목자는 양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날마다 양을 헤아리며 살핍니다. 필립 켈러는 케냐에서 코브라를 때려죽인 마사이의 젊은 목동 소개합니다. 만약 손에 막대기가 없었다면 코브라에 물려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막대기 하나가 아닙니다. 광야와 사막에서 만나는 수많은 해로운 동물을 제압하는 무기가 바로 막대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키는 막대기입니다. 위협과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지팡이는 손 잡이가 크게 휘어있는 것으로 지팡이는 양의 목에 넣어 잡아 끄는 역할을 합니다. 겁 많고 소심한 양이나 고집스러운 양을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풀숲이나 가파른 언덕에서 끄집어 낼 때 지팡이가 사용됩니다.

다윗은 4절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삼자가 아니라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목자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아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