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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편지들에 비해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인사는 비장함이 흐릅니다. 세 번째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것을 이야기하고, 이번에 가면 절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2절) 왜 굳이 이렇게까지 말해야할까 의아해 보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말합니다. 이 대답이 왜 나왔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고린도교회의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사도바울의 사도직은 의심하고 또 의심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바울의 복음 전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그들이 왜 바울을 의심하는 것일까요? 이 아이러한 일은 결국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안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줄곧 지금까지 오직 십자가만을 이야기했고, 강조했습니다. 저희들이 고린도전후서는 제대로 읽었다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른 복음에 안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끊임없이 바울에게 도전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인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일은 그들의 증명해 보이라고 말한 것들은 대체로 방언이나, 환상 등의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몇 가지의 경험들을 말하기는 했지만, 결미에 가서는 이러한 일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표지도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5절에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들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너희들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합니다. 이 확증에 대해 조석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윤리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 된다는 뜻이다.”
바울의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 내가 사도이고 아니고는 두 번째 문제다.” 우리는 종종 내 자신을 보지 못하면서 타인에대해 너무나 잘 평가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보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12장은 11장에 이어 바울의 또 다른 자랑과 다시 고린도교회를 갈 계획을 이야기 합니다. 12장은 마지막 장인 13장을 준비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합니다.
1-13절 바울이 받은 환상과 계시
14-21절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
1-13절 바울이 받은 환상과 계시
11:16절부터 이어진 바울의 자랑이 12장 전반부까지 이어집니다.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자랑은 이전의 자랑과는 사뭇 다른 자랑입니다. 12장의 자랑은 삼층천에 올라간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7절에 의하면 그 사람은 바울이 확실합니다. 아마도 편지의 수신자들인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환상 체험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다시 그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울의 사도직이 갖는 독특성, 그리고 권위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체험한 환상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2절에 의하면 바울은 ‘십사 년 전에’ 이 경험을 했습니다. 고린도전후서기 기록된 시기는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AD55 그해 가을 또는 한 해 후인 AD56년 봄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가 왜 중요한가하면 바로 ‘십사 년’이란 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시기는 AD33년 또는 AD34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체험을 한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11:32-33에서 바울은 다메섹 아레다 왕을 언급합니다. 즉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다메섹으로 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을 뜨게 됩니다. 바울은 곧바로 다메섹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9:20-22에서 누가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9:20-22]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이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자 광주리를 타고 성벽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1:32에 의하면 유대인을 잡으려고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레다 왕의 고관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다메섹 왕 아레다 왕에게 바울을 잡으라고 로비를 벌인 것이 분명합니다. 어쨌든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빠져 나갑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의 회심 시기는 AD41-2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최갑종 교수는 다른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해 바울의 회심시기를 AD33/4년으로 추정합니다. 외부 연대기에 의하면 바울이 언급한 다메섹 왕 아레다는 주전 9년-주후 38/39년 사이에 재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회심시기를 정확하게 확정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분명 그 즈음에 회심을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과연 어떤 것을 경험할 것일까요? 먼저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하늘로부터 강력한 빛이 비추어 바울이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 이때 바울의 영혼이 삼층천에 이끌려 간 것으로 보입니다. 4절은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고 말합니다. 낙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에 죽어서 가는 천국의 개념과는 약간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낙원을 죽은 사람들이 쉬는 장소로 이해했고, 기독교인들은 그곳을 의인들만 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는 낙원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계시를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4절 후반부에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으로 가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고전 13:1)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은 아무도 천상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다메섹 체험을 통해 회심을 언급한 적은 있지만 낙원까지 이끌려 가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프만이란 학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은 그 자랑을 배격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7절에 의하면 이 체험은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가 너무나 중요하고 특이한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가시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조석민 교수는 사탄의 가시로 불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를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계시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무시될 수 없는 계시임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특이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매우 교만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타인들을 거의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이 마치 자신의 영적인 권위와 수준을 말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한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연락하는 분입니다. 마흔이 넘어서 신학을 시작하셨고, 작은 개척교회를 하고 계시지만 가끔 만나서 이야기하면 항상 자신이 40일 금식했다는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합니다. 설교 시간에서 종종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말 설교도 못하고, 인품도 별로인 분이고, 교회도 몇 명 나오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금식에 대한 경험에대해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아마 바울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크게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철처히 낮추셨습니다. 가시를 주셔서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깊이 체감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아니면 삶이 내가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을 때, 비로소 ‘아 나는 사람이구나. 아, 하나님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울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가시가 없어지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가시를 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건강해야 많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될 때 사람은 반드시 교만해 집니다. 많은 일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는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말을 잘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머물 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특히 영적인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고백을 통해 많은 영적 은사와 체험을 가진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은사와 통찰력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당을 짓고 비방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이 없다면 그들이 가진 어떤 능력이나 은사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9절 후반부에 보니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합니다. 10절에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즉 약한 그때가 가장 강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 약함을 단순히 연약함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약함은 ‘겸손한 약함’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14-21절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
바울은 이제 편지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14절부터는 편지의 마무리하는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14절에보니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교회에 가기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대적하는 대적자들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라 너희’라고 말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 재물을 저축하고 사용하는 것처럼,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 내어주리니’라고 고백합니다.(15절) 20절에서는 바울이 다시 고린도교회를 찾았을 때 아직도 다투고, 시기하고 분내고, 당을 짓는 일이 있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러한 일들에서 벗어나 건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야할 것을 권고합니다.
마무리
12장은 환상이나 특이한 체험을 자랑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강함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약함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결혼식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이제 신랑 신부가 입장합니다. 그런데 어떤 한 남자가 나타나 신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서 도망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11장 속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을 신랑인 예수님께 신부인 성도를 중매하는 중매쟁이로 소개합니다.(2절)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유혹하여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황당한 사건을 보면서 갈팡질팡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무엇이 진짜이고 참인지를 분간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아래와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5절 거짓교사들의 유혹
16-33절 참 사도의 표지들
1. 1-15절 거짓교사들의 유혹
바울은 11장을 시작하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해 달라고 말하면서 한 가지 염려를 토로합니다. 3절에 보니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아담의 타락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지금이 마치 그 때와 같다고 말합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수위가 높은 경고입니다. 4절에서 그 수위를 명확하게 표시합니다. 거짓교사들이 전파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다른 예수’와 ‘다른 영’ 심지어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에 대해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유심히 보십시오. 예수입니다. 그러나 다른 예수입니다. 또한 ‘영’이지만 다른 영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입니다. 겉으로는 예수이고, 영이고, 복음입니다. 그런데 속을 열어보니 다른 것, 즉 가짜였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14절에서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4절 후반부에서 ‘그런데도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정확하게 바울의 중매를 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는데 결혼식날 신부를 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고린도교회가 너무나 당연하고, 그리고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처음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해달라고 말했지만, 그 어리석음은 바울의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와처럼 마음이 부패하여 진짜 예수와 참된 영, 진정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다른 예수가 무엇인가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명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반부인 16-33절까지의 내용은 참고해 본다면, 다른 예수는 고난 없는 예수를 말합니다. 또 하나는 2-3절에서 추론해 본다면 거룩하지 않는 삶, 즉 타락한 삶을 계속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거짓 교설(巧說)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교묘하고 달콤해 보였습니다. 마치 사단이 하와의 귀에 속삭이던 그 달콤한 말과 같았습니다. 그로인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마음을 닫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는 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세상을 탐닉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바울에 이제 후반부에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복음, 진정한 예수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16-33절 참 사도의 표지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 예수 믿음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자랑이 시작됩니다. 먼저 22절을 봅시다. 먼저 대적자들은 유대인들로서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하는 교사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추천서는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쨌든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고후]11: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먼저 바울은 그들이 히브리인 것처럼 자신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인도 동일합니다.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입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23-27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어서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들을 들려 줍니다. 옥에 갇히고,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고,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았고,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세 번이나 배가 침몰하여 일 주야를 바다에서 표류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 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 마르며, 춥고 헐벗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까지 사지로 내몰았을까요? 28절에 보니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28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바로 세울까를 밤낮으로 걱정하고 고민했습니다. 누군가 실족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잠을 자지 못하고 가슴 아파했고, 누군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며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성도들을 볼 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 아파하고 또 아파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많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진정한 자랑은 누군가보다 탁월한 무엇이 아니라 성도를 사랑하는 그 마음인 것입니다.(30절)
연보의 문제를 해결한 바울은 다시 사도직 변증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사울의 사도직 변증을 읽을 때는 항상 그가 전하는 복음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는 크게 1-9장까지가 전반부이고, 10-13장까지가 후반부에 속합니다. 전반부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했던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해명과 복음이 가진 우월성, 그리고 연보에 대한 조언들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10장부터는 부드럽던 어조가 강력하고 책망조의 분위기로 바뀝니다. 이것은 아직도 그들 가운데 바울을 공격하고 잘못된 가르침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은 바울의 사적인 내용에 가깝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6절 교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부탁
2. 7-11절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사도적 권위 설명
3. 12-18절 자기 자랑이 심하다는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해명
1. 1-6절 교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부탁
아마 바울처럼 많은 비난을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비난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열정 때문입니다. 가끔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비방을 받은 것도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바울은 ‘너희를 대면하고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앞에서 권위적이거나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유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권위도 없고 무기력하다는 소리를 듣게 했던 것입니다. 10절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글에는 강한 힘이 느껴지지만 실제로 만나 말을 들어보면 힘이 없어 무기력해 보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들의 비방에 대해 뜻밖의 이야기로 대응합니다. 3절에서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능력(δυνατός)’이란 단어는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을 받고’라고 말할 때 바로 그 단어와 어원이 동일합니다. 사도행전 2:22에서 사용된 ‘권능’이란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약해 보인다고 하지만, 바울이 사용하는 무기는 육체적이인 강력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만듭니다.
2. 7-11절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사도적 권위 설명
확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육신에 치중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7절에서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라고 비판합니다. 외모, 즉 겉으로 드러난 것에 가치를 두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서술형이 아니라 명령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잘 어울립니다. 즉 ‘여러분은 드러난 것을 똑바로 보십시오!’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7절 중후반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똑똑히 보아라. 만약 대적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너희들은 이것을 다시 깊이 생각하라.”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난 것들이 있는데 왜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사도바울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극적으로 체험했고, 수많은 영적 경험과 고난과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선명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도 대적자들이 바울을 비판하는 것에 너무나 쉽게 동조하는 성도들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 앞에서 엄하지 않고 유순하게 행동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신 권세는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해서 주었기 때문입니다.(8절)
3. 12-18절 자기 자랑이 심하다는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해명
3:1에 의하면 바울을 비방했던 대적자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가지고 다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다른 이방 교회의 어머니와 같고,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추천서가 어떤 것이며, 누구에게 받았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예루살렘 사도 출신이 아닌 바울로서는 그들의 추천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확고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의 복음은 그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추천서를 믿고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다녔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17절)고 말합니다.
고후 9장은 연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우리는 고후 9장을 통해 현대적 의미에서 헌금의 원리를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1-5절 연보는 미리 준비 되어야 한다.
6-15절 헌금의 원리
1. 1-5절 연보는 미리 준비 되어야 한다.
1-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의도는 명확하고 간단합니다. 연보는 준비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니 마케도냐 교회에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일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케도냐 사람들은 우리가 아가야 사람들에게 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연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가야 지방은 고린도가 수도 역할을 했고, 그 주변의 헬라 지역을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에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준비하도로 명한 것 같습니다. 고전 16장 1절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처럼 명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오래 전에 연보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보입니다. 미리 준비함으로 억지가 아닌 참 연보가 된다고 말합니다.(고전 16:1-2)
바울은 아마도 이 즈음에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고린도교회는 일 년 전부터 연보를 준비하고 있다고 자랑한 것으로 보입니다. 8:10에서 분명히 바울은 일 년 전부터는 이 일을 계획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고린도교회가 충분히 연보를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서로 분당을 지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과정 속에서 제대로 된 연보가 나올리는 만무합니다. 바울은 이제 교회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연보의 문제를 속히 마무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를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자랑했는데 마케도냐 교회 대표들이 고린도교회에 가니 아무 것도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까봐 당혹스러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절의 ‘헛되다’는 표현은 ‘텅비다(κενόω)’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고전 9:15에서는 동일하게 ‘헛되다’로 번역했고, 빌립보서 2:7에서는 ‘비우다’로 번역했습니다. 마치 속이 텅 비어있는 항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말로는 자원하여 연보를 작정하고 미리미리 준비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가서보니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는 미리 준비되어야 합니다. 미리 준비한다는 말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조금씩 모은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헌금을 전혀하지 않아서 물어 본적이 있습니다. 믿음도 있어 보이고 신실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헌금은 전혀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이외의 답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일년 마지막 달에 내려고 마음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하면 너무 유치해 보여서 나중에 부자되면 한꺼번에 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신기했지만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가르쳐 주었습니다. 딱 마디 했습니다.
집사님! 내일 주님께서 집사님을 부르시면 어떻게 하실 랍니까?
그 분의 의도는 나름 좋았는지 모르지만 인생을 너무나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지 않더라도 갑자기 사업이 망해서 먹고 살기에 급급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헌금은 주기적으로 조금씩 천천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헌금생활입니다.
2. 6-15절 헌금의 원리
이제 바울이 말하는 연보의 원리로 돌아가 봅시다. 8장에서는 예수님의 자기부정과 만나의 법칙을 통해 교훈했습니다. 9장에서 이 부분을 좀더 확장시켜 설명합니다.
ㄱ.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6절에서 바울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다는 일반적인 농사의 원칙을 연보의 원리로 소개합니다. 농부가 많이 거두고 싶다면 많이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가 헌금에도 적용될까요? 헌금을 많이 하며 무엇을 거둔다는 말일까요? 중간의 해석을 건너뛰어 10절로 가보겠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너희에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분명히 신명기 언약에 근거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주변 이웃 가운데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꾸러 온다면 거절하지 말고 넉넉히 주라고 권면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신명기 15:10-11]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헌금을 하고 누군가를 도울 때는 그 사람에게 받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이웃을 돕는 이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계명에 확신을 갖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그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ㄴ. 의의 법칙
9절에서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112:9입니다.
시 112: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그런데 앞선 구절에서 시편기자는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고(112:3),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자는 잘 된다고 약속합니다.(112:5) 부와 재물이 결론적이라면 ‘의’는 그의 행위의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제한 것임을 말합니다. 의는 어떤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바로 그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시편 112편에서는 의롭다는 표현이 4절과 9절에서 두 번에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 112: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초대교회가 구제를 ‘의’로 곧바로 직역했다는 것은 마태복음 6장으로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가운데 있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1-2]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자 보십시오. 연보, 특히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가를. 육신의 소유를 일부 덜어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단순히 긍휼의 차원을 너머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찬 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10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바울이 왜 복음전도와 더불어 구제사역에 힘을 쏟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ㄷ. 실천의 원리
마지막 원리를 실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에만 머물지 않고 삶을 통해 드러나고 열매 맺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삶으로 드러난 말씀이 곧 진짜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 3:17-18]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8-9장에서는 연보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연보에 대해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것을 언급함으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주의를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사실은 바울이 비방을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연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연보한 것을 바울이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비방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만약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었다면 연보 이야기는 당분간 꺼내지 않은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며,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8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5절 연보의 원리
ㄱ. 1-7절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
ㄴ. 8-15절 연보의 영적 원리
16-24절 연보를 위한 디도의 사역
1. 1-15절 연보의 원리
1-15절에서 바울이 연보에 대해 두 가지 원리를 제시 합니다. 하나는 마케도냐 지역 교회들이 보여준 연보의 모범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연보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마케도냐 성도들이 보여준 연보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2절에 보니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6:2)
2절을 유심히 읽어보면 문법적으로 잘 맞지 않습니다. 어색하고 이상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이상한 문장을 사용했을까요. 먼저 두 의미가 대립되고 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넘치는 기쁨’이 대립됩니다. 다름은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가 대립됩니다. 이 문장을 다시 현대적 의미에 맞게 의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마케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환난으로 인해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그들은 극심한 가난에 빠져있었지만 더 가난한 교회를 돕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풍성한 연보를 했다.”
3절에서는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참으로 교회가 배워야할 교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 이었음에도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꺼이 목숨과 같은 소유의 일부를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이라고 말합니다. 마케도냐 성도들은 그것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5절)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마케도냐 성도들이 헌금을 많이 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린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은혜(χάρις)’입니다. ‘은혜(χάρις)’라는 단어는 대개 ‘은혜’로 번역하기는 하지만 원뜻은 ‘선물’이란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입니다. 우리가 가진 영적 은사도 역시 ‘χάρις’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1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마케도냐 성도들이 다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 드린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본절을 주해한 스캇 하프만 이란 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케도냐인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는 극심한 곤란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을 향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극심한 가난’의 상태에서 넘치는 관대함을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넘치는 기쁨’을 발할 수 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 있는 사람의 형상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고통당하고 멸망 받아야할 죄인들을 위해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대신하여 버리심으로 그들은 구원하시고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유하게 되고,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고, 주님께서 버림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후에 마케도냐 교회 중의 하나였던 빌립보 교회를 다루면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2:5-8절까지의 내용을 읽어 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마케도냐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칭찬 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바른 진리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빌립보교회는 자신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불쌍한 교회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소유의 일부를 내 놓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원리를 다시 광야에서 내린 만나를 얻은 출애굽 이야기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니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16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6:17-18을 읽어 보겠습니다.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애굽기 16:17-18)
연보의 원리를 어떻게 출애굽 당시의 만나 사건에서 끌어올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만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내려진 것처럼 신약의 교회가 내는 연보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성도는 언제나 자신이 것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다른 성도를 통해 그가 어려울 때 돕게 하십니다.
2. 16-24절 연보를 위한 디도의 사역
8:16부터 시작된 연보 이야기는 19장까지 한 주제로 묶여진 것입니다. 연보를 다룸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소개합니다. 나중에 우리는 디도서를 통해 디도에게 준 바울의 개인적인 권면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디도가 가진 마음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디도는 바울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교회를 향한 사랑이 동일하게 디도에게도 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온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음식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있고, 정치색은 다를 수 있어도 교회를 향한 마음은 동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핏 값으로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디도는 자원했습니다. 17절에 보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했다고 말합니다. 우선은 바울의 권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도는 바울의 권함을 뿌리치지 아니하고 기꺼이 자신이 수고하기로 결정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는 어지럽고 다툼 속에 있습니다. 지금 연보 때문에 심각한 오해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이런 어지러움 속에 자원한다는 것은 자칫 자신이 모든 오명을 뒤집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간절함으로 자원했습니다.
셋째, 디도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도를 향해 ‘나의 동료, 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디도는 한 마디로 바울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으로 되돌아가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우리의 편지’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낸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디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도 뿐 아니라 다른 한 형제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그 디도가 바울을 대리한 사람이라면 한 형제는 마케도냐 교회를 대변하는 교회의 대표와 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디도는 목사이고, 한 형제는 장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형제 또한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은 받는 자’(18절)이며,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19절) 적지 않은 학자들은 함께 동행하는 형제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사 누가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디도 혼자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대표를 보내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의 깨끗함을 보이고, 헌금을 잘못 사용하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즉 공적인 돈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명백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