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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안소영의 책 <책만 보는 바보>가 있다. 조선 독서가로 유명한 이덕무와 그의 벗들의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해 어떤 내용인지 분명치 않으나 독서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늘 기독교 서점에 들러 몇 권의 책을 구입했다. 문득 드는 생각인 '나는 책만 사는 바보는 아닐까?'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은 책 중에 이덕무의 이야기를 엮은 <책만 읽는 바보>라는 책 제목이 생각이 난다. 이덕무는 책을 읽고, 나는 책만 사지 않는가.
이번에 구입한 책들이다.
이익열 <하브루타, 교사가 답이다> 두란노
손성현 <칼 라너의 기도> 복있는사람
존 오트버그 <예수는 누구인가> 두란노
번 S. 포이트레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예수의 기적> 새물결플러스
스캇 맥나이트 <예수 신경> 새물결플러스
예수 신경, 예수의 기적, 예수는 누구인가? 는 예수 묵상집을 위한 참고도서이다. 지금까지 성경 묵상은 했지만 예수 묵상은 한 번도 진행한 적이 없다. 물론 성경이 예수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말이다. 강해에 중심을 둔 묵상과 예수의 행적과 인품에 중심을 두는 묵상은 다르다.
이번에 구입한 책들은 저자들도 낯설다. 번 S. 포이트레스는 <예수의 기적> 외에도 2018년 이레서원에서 출간된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이 있다. 이 책은 재미있게 읽던 책이다. 2020년 2월 새물결플러스를 ㅌ오해 <신현>이 번역 출간되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꽤나 관심이 가는 책이다. 스캇 맥나이트와 포이트레스 외에 나머지 저자들은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기껏해야 루이스 벌코프의 조식 신학 책을 읽고 시험 친 것이 전부인 필자에게 칼 바르트와 판넨베르크는 이름 조자 버겁다. 어떤 이들은 최근의 보수주의 학자인 존 프레임 등을 언급하지만 그들과는 비할바가 아니다. 성향도 수준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필자도 존 프레임을 좋아하고 조직신학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는 항상 기본에 두는 학자이다. 그럼에도 그들과 비교할 바는 확실히 아니다. 특히 판넨베르크는 낯설고 어색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판넨베르크는 이름만 존재할 뿐 번역된 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년 5월 10일 ~ 1968년 12월 10일)
물론 찾고 찾으면 못 찾을리 없다. 가톨릭 계열의 분도출판사에서 <인간학>이란 제목으로 세 권이 1996년에 출간되었다. 2000년에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자연신학>이란 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들출판사에서는 <기독교 윤리의 기초>와 <사도신경 해설>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외에 몇 권이 더 있기는 하지만 2017년부터 2019년에 걸쳐 새물결출판사에서 세 권의 조직신학이 출간되었으니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판넨베르크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신학 정서상 판넨베르크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신정통주의를 표방한 칼 바르트에 대한 호의는 한국 신학 안에서 적극적 옹호와 적극적 반대의 입장으로 양분되어 있다. 몰트만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정말 모호하다. 전에 잠깐 언급한 것도 있지만 판넨베르크는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신학자이며, 굳이 연구할 의미가 찾지 못한다. 사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많은 부분에서 칼 바르트와는 너무나 다르고, 그렇다고 몰트만처럼 특이한 방향을 가진 것도 아니다. 판넨베르크의 저작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의외로 보수적이라는 것에 놀란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신학 성향은 독일이라는 관념 철학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는 것과 초월을 강조했던 칼 바르트로부터의 반동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Wolfhart Pannenberg, 1928년 10월 2일 ~ 2014년 9월 5일)
최근 비아출판사에서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서론>이 출간되면서 서평이 두 개의 서평의 올라왔다. 한 편은 광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고경태 목사이며, 다른 한 편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인 김진혁 교수이다. 두 사람의 서평은 하단에 링크했다.
내용은 차치하고 두 사람은 일단 조직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란 점이기에 집에서 책만 읽어대는 필자와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단의 평범한 목사로서 현대 독일 신학에 논하기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두 사람의 글을 읽으면 의외로 특이한 몇 가지가 발견된다.
먼저는 판넨베르크가 신정통주의를 표방했던 바르트로부터 벗어나려했다는 점에서는 둘 다 동의한다. 하자만 고경태는 판넨베르크가 바르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의 그림자에 있다고 생각하고, 최소한 그림자를 벗어났을지라도 그 그림자의 연장일 뿐일 것이다. 바르트가 제시한 신론 체계를 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경태
그 근거를 판넨베르크의 '신론'에서 찾았다. 필자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을 접한 적이 없기에 간과하기로 한다. 고경태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보편성까지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하나님 아들의 보편성'이다. 고경태는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유기'를 하나님의 아들됨의 표지로 보았던 반면 판넨베르크는 '아들의 보편성'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필자의 식견으론 아직 판넨베르크의 '아들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과학과 이성, 자연신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접점을 찾으러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다. 초월을 강조했던 바르트와 내재를 강조했던 판넨베르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긴장에 비교된다.
김진혁의 논지는 약간 다르다. 고경태가 말한 '보편성'을 김진혁은 '포괄성'으로 받는다.
진리의 보편성은 조직신학자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제약에도 포괄적 지평 혹은 포괄적 해석을 추구하도록 계속 자극한다. 실제 <조직신학 서론>의 각 장을 읽어 보면 포괄성을 향한 조직신학의 이중적 추동력이 세부적 논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판넨베르크의 보편성과 포괄성은 세상과 '대화'하려한 의도가 분명한다. 김진혁은 세상에게도, 신앙인들에게도 모호하게 판넨베르크가 비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세속화한 사회를 배경으로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을 추구하다 보니, 세계 기독교 시대의 복잡한 신학적 도전이나 복잡한 정치적 맥락에 그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판넨베르크는 칼바르트의 제자가 맞다. 그렇지만 동시에 반동이기도 하다. 세상과 대화하려 했던 성향은 '화해의 신학'으로 정의될 수 있는 몰트만과 방향이 동일하다. 다만 몰트만이 기독론에 집중했다면 판넨베르크는 신론에 몰입한다는 점이 다르다.
칼 바르트와 판넨베르크의 차이를 '포괄성'으로 설명한다면,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의 차이는 '역사성'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르트든, 판넨베르크든, 몰트만이든 평범한 목사에는 버겁다. 이름만 들어도.
겨울이 오려나. 오늘 유난히 춥다. 나만 그렇나? 아내도 춥단다. 오전은 늦게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형언하기 힘든 무력감이 밀려온다. 목포에 내려온 후 단 한 번이라고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때가 있었나? 깊은 늪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월요일이면 답답한 마음에 목포를 벗어난다. 무안도 가고, 신안도 가고, 영압도 가고, 강진도 장흥도 간다. 그러고 보니 완도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언제가 가겠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 대흥사에 가자고 했으니... 아직 갈 마음이 없다. 꽃무릇은 지나고 코스모스가 한 창이다.
아내와 딸은 서로 마주보며 웃는다. 코스모스처럼 환하게.
오늘도 책을 사러 하당에 나갔다. 목포에서 그나마 서점다운 한솔 서점에 가기 위해서다. 아내는 봐 둔 책이 있다며 가자고 한다. 답답한 마음에 나도 급히 챙겨 길을 나섰다. 아내는 들뜬 마음으로 말한다.
"나도 책을 볼테니 당신도 당신 원하는 책 고르세요."
언뜻 들으면 책을 사줄 것 같은 말이지만 늘 책 값은 내가 계산한다. 오늘도 역시... 유차영의 책이 무려 5만 원이라 책값만 15만 원이 넘었다. 일반 오프라인 서점이 할인이 전혀 없는 덕분?에 고스란히 지불했다. 가격만큼 책은 무거웠다.
아들 신검 때문에 광주에 들렀다. 광주 알라딘에 들러 인터넷 관련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배식한 <인터넷, 하이펴텍스트>책세상
호리 마사타케 <지적 생활의 설계> 홍익출판사
메튜 프레이저. 수미트라 두타 <소셜 네트워크 혁명> 행간
강준만 <대중문화의 겉과 속 1> 인물과사상사
이런 책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 세월이 참 빠르다 싶다. 십여년 전 블로그나 클라우드라는 단어가 굉장히 낯설었는데 이젠 그것도 구식이 되어가니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종이 책이 출간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인터넷 이후 일반 TV가 급속히 축소된 것처럼 종이책 역시 사라지지는 않지만 축소되는 것은 사실이다.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는 가 보다.
매일 성경을 읽는다. 이번 달 안에 성경 일독을 목표로 지난 단부터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천주교 성경으로 토빗과 유딧을 읽었다. 아직 읽을 외경과 위경이 산을 이루지만 틈 나는 대로 읽고 있다. 처음 읽는 토빗과 유딧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토빗의 경우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된 <암브로시우스 토빗 이야기>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던 그때와 지금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암부로시우스가 토빗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책 한 권을 펴낼 정도로 토빗 이야기를 풀고, 해설하고, 설교한 것이 <암브로시우스 토빗 이야기>다.
토빗은 앗수르에 의해 니느웨에 포로로 잡혀간 납달리 지파 '토빗'의 이야기다.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지만 가톨릭은 느헤미야 바로 뒷편에 넣어 정경으로 인정한다. 유대적 신비주의가 스며있는 토빗은 구제와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7번 결혼을 했지만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에 의해 신랑이 첫날밤에 모두 죽어 과부가 된 사랑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후에 사라는 라파엘의 도움을 받은 토빗의 아들 토비야에 의해 악귀를 쫓아내고 회복된다. 사라와 토비야는 결국 결혼하게 된다.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토빗에는 니느웨에서의 포로 생활과 그들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성전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속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제를 속죄의 한 방편으로 보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비록 이방인들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고 강조한다. 흥미롭게도 14:3에 나훔에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한 것을 언급하며 토빗은 아들 토비야에게 니느웨를 떠나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간기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지서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유딧기'는 '토빗'보다 더 흥미로웠다. 남편을 잃은 유딧(Ιουδιθ)이란 유다 여인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를 침공한 느브갓네살 사령관인 홀로페르네스를 죽여 앗수르 군대가 패망하여 도망가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지키신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 같다. 유다를 공격 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말한 암몬인 아키오르는 종결부에서 모든 상황을 듣고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집안에 합류'한다. 아키오르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따라 살며 할례를 받는다면 얼마든지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방인에 대한 생각은 철두철미하게 이방인을 추방했던 느헤미야의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아마도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에서 유대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이방인들이 할례와 토라를 통해 유대인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지혜문학에 속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에스더서와 사사기에 등장하는 겐 사람 야엘과 섞여 있는 듯하다.
어제저녁 아내의 선물이 도착했다. 작년부터 나온다는 소문만 무성했던 책이다. 천 쪽 가까이 되는 분량을 몇 달만에 번역하고 책으로 엮어 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린 만큼 시간은 더디 흘러갔다. 며칠 전 드디어 알라딘 신간에 책이 보였고, 곧바로 블로그에 신간 소개를 올렸다. 아내는 나의 글을 보고 '사줄까요?' 운을 띄운다. 마다할 이유 없으니 사달라고 했다. 그러나 오만 원이 넘어가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아직 사야 할 책이 한 두 권이 아닌데 말이다. 중간기 문헌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책도 몇 권을 더 사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괜찮으니 사준다 한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아내의 선물이다.
저자인 존 바클레이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현재 더럼 대학교 신약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책은 그동안 바울신학계를 요동치게 했던 '바울에 대한 새 관점'에 종지부를 찍을만한 역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 관점 주의자들이 어거스틴을 시작으로 이어져온 전통적 바울에 대한 칭의 개념을 뒤집고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동안 전통 주의자들이 믿어온 율법이 구속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단지 유대인들의 정체서를 유지하기 위한 표지, 또는 표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파이퍼 등을 위시로 한 적지 않은 학자들이 반대 입장을 내놓았지만 학문적 근거가 빈약해 그들과 논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주장이 확고하고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바울이 말한 율법의 문제를 전통적 관점이나 새 관점과 다르게 '선물'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만 체제 전복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은혜의 이러한 실천이 단순히 교회의 민족적 통일성이나 아브라함 약속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은혜에 근거한다는 점을 추척한다. '묵시론적 바울'처럼 나는 인간의 상속 조건이나 가치에 상관없이 주어진 그리스도의 선물이 야기한 체제 전복적인 영향력을 강조한다."(11쪽,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의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 자체가 체제 전복적이라는 것이다. 즉 누군가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무조건적을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물이 갖는 역사적 의미들을 추적해 나간다. 그리스도 로마 세계에서의 선물과 교회의 의미, 현대적 사회가 갖는 선물의 의미를 탐색한다. 3장에서는 역사적 전통 속에서 바울의 은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찾아 나선다. 어거스틴(3,2), 루터(3,3), 칼뱅(3,4), 바르트에서 마틴까지(3,5), 그리고 샌더스와 그 이후의 논쟁까지(3,6-7) 끌고 간다.
만약 여기서 이 책이 마무리되었다면 현재의 논쟁을 좀더 상세하게 풀어놓은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더 나아간다. Ⅱ부에서 제2성전 시기에서 '하나님의 선물'이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를 살펴본다. 이러한 연구를 불가피하게 시도해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선물은 하나의 단일한 현상도 아니고, 고정된 범주를 갖고 있지도 않다. 서로 다른 시대의 다양한 문화 안에서 수많은 대상, 행위, 관계들이 선물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로 세월이 흐르면서 선물의 정의는 많은 문환 속에서 변화했다. 바울과 동시대 사람들이 선물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비나 인간의 자선에 관해 말했다면, 오늘날 선물 관련 용어들을 재현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의 함의와 함의가 아닌 것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39쪽)
그렇다. 바울 당시의 유대주의 사회가 담지했던 '하나님의 선물'이 갖는 의미를 파악해야 바울 신학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는 제2성전기 문헌을 주의하여 본 새 관점 주의자들과 맥을 같이한다. 저자는 인류학적 조사에서 선물은 다양한 정황 속에서도 '선물-답례'라는 보편적 의미가 있음에 주목한다. 제2성전기 문헌과 바울 서신을 비교 연구해본 결과 당시 문헌 속에서도 은혜는 적지 않게 나타난다. 그러나 현저히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일반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은 이방인을 선교해야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557쪽)
바클레이는 마지막으로 바울의 문헌들을 살핀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바울의 교회 교리는 그의 은혜 구원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은혜 구원론은 또한 인간의 곤경을 우주적.개인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그의 견해도 형성시키며, 원래의 정황을 훨씬 뛰어넘는 신학적 중요성과 사회적 함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951쪽)
저자는 '비상응적 은혜'가 가진 폭발적 힘으로 인해 기존의 가치와 기준을 허물고 혁신적 공동체를 세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결론에 의해 스스로 '새 관점과는 결별'(950쪽)한다. 비 상응적(incongruity)이란 말은 자격이 없음에도 거저 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선물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비상응성 선물('은혜'는 동일한 카리스이다)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 말미암은 것들의 전부'이다. 로마서 1:1-5:11 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은 그리스도 인들이 행하는 행위는 구원을 위한 수고가 노력이나 조건이 아니라 '신적 능력의 행위'이며, '악한 인류에게 주어진 비상응적 선물'(790쪽)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정확하게 전통적 구원관과 일치한다. 즉 믿음으로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갈라디아서) 성령을 받고, 그 성령으로 선한 행위 또는 성령의 법(노모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선물은 받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자에게 가장 깊은 애정과 가장 높은 헌신으로 주어지는 가장 값비싼 선물'(798쪽)이 확실하다.
비상응성의 은혜, 즉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진 선물(은혜)야 말로 기존이 가치와 기준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시작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사람도 값을 주고 선물을 살 사람도 없고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그 선물이 너무 크기 때문에, 너무가 귀하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도 살 수 없다. 선물은 어쩔 수 없니 공짜로 주어져야만 했다.
책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난 후 문득 앞선 중간기 문헌들과 비교해 보았다. 비록 그 문헌들이 유익하고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선물(은혜)'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중간기 문헌들은 대체로 권선징악이나 선의 대가로 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바울의 은혜는 비상응성, 즉 흠 있고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값 없이 선물로 주신다. 그것도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영생과 생명과 천국의 소망을.
그뿐 만이 아니다. 나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상응성의 은혜가 과하도록 많다. 매일 아침마다 밥상을 차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청소와 빨래는 불평 없이 감당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미안하고 고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이다. 무엇인가 해야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은혜(선물)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함의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많은 희생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가 자식들에게 베푼 은혜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성에 부어주신 특별한 은혜이다.
이 책을 선물한 아내게에게 감사한다. 또한 나에게 '아내'라는 최고의 선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나저나 난 언제 착한 남편이 될까?
신약학계는 오랜 기간 다음의 두 주제, 1) 바울의 은혜 신학과 2) 바울의 은혜 신학이 유대 전통과 맺고 있는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많은 연구를 활발히 진행해오고 있다. 바클레이의 『바울과 선물』은 바로 이러한 정황 가운데 등장했다. 바클레이는 이 책에서 “선물” 개념(특히 하나님의 선물)에 집중하면서 은혜와 선물, 이 두 개념이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근거로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바울의 은혜 개념을 조명한다. 이는 바울의 은혜 신학과 관련하여 옛 관점(old perspective)과 새 관점(new perspective) 양 진영에 속해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흥미로운 대안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바클레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