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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나그네로서의 삶의 방식

샤마임 201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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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로서의 삶의 방식

 

본문 벧전 2:11-17

 

거류민 나그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성도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가끔 지금 이곳이 너무 좋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를 망각(妄覺)할 때가 많다. 성도라 할지라도 완전한 영화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린 마음 속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역사하고 있어서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탐하고 살아간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이라고 표현한다. 뗄 수 없는 것이지만 포용하고 관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싸움의 대상인 것이다.

 

천로역정에 보면 순례자의 길을 가다 망각의 땅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잘못하면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 세상은 우리들에게 천국의 불필요성을 말한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와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야곱의 가족을 가족이 아닌 거대한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족함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나일강 삼각주에 자리한 애굽은 물과 곡식, 과일이 풍성하며 왕정체제를 이루고 있어서 타국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는 안정적인 나라였다. 부족함이 거의 없는 애굽에서 많은 후손들을 보게하여 거대한 민족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가나안으로 가자고 했을 때 그들은 ‘왜 이곳을 떠나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비록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풍부한 애굽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갔을 때도 이스라엘 민족들은 약간의 부족함이 느껴지면 곧바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왜 우리는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곳에서 죽게 하느냐’고 따져들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애굽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망각하고 만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너희들은 나그네들이라고 말씀하신다.

1:24에서 육체를 풀이요,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이것의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다. 애굽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계속 있고 싶어하지만, 애굽의 영광은 풀과 그 꽃과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살펴보자. 필자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배를 탔다. 하선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 나중에 제가 돈을 많이 벌서 호강시켜 드릴께요’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의 인생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린다. 넌센스 퀴즈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를 ‘눈 깜짝할 새’라고 하지 않는가. 정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눈 깜짝할 새다. 순식간에 필자의 나이도 마흔을 넘어 버렸고, 몸도 썩 건강하지가 않다. 언제나 청춘 인 것 같고, 영원토록 건강하고 오래오래 젊음을 유지하며 살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한낱 소망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눈 깜짝할 새’지나가 버린다. 우리는 속이면 안 된다. 우리는 이곳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나그네로 거류민으로 있다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하라고 말한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예수님의 성만찬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인육을 먹는다는 오해가 있었고, 기존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혁명세력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문제이지 전혀 세상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도 헤롯은 베들레험의 어린아이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던가. 철저한 오해였던 것이다. 또한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력을 모아 로마와 대항하는 반역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해 영적인 동시에 성도는 나그네로서의 삶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로마를 축출하고 독립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한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베드로 사도는 세상이 권위에 복종하고 세상의 질서를 따르도록 촉구했다. 주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을 전복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영적인 나라는 어떤 곳인가?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십자가의 도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도의 본질은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물질에 대한 욕망, 출세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을 ‘똥’처럼 버려야 한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자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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