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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성찬? 최주훈목사

샤마임 2020.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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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루터교 최주훈 목사의 글을 가져온 것이다.

온라인 성찬?

최주훈목사


유럽에선 성매매업소와 교회가 같은 이유로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이 돈다. 누가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했을까. 그렇게 비극적이고 위중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코로나는 우리 삶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주일성수, 주일예배 휴회, 온라인 예배에 대한 논의가 뜨겁더니 부활절이 다가오자 급작스레 온라인 성찬에 대한 찬반토론이 달아오른다. 예배학자, 역사학자, 조직신학자들이 참전한 이 논의가 너무 뜨거워서 말 한마디 잘 못하면 화상을 입을지도 모르겠지만, ‘루터교회 목사관점에서 나도 한마디 보태야겠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몇 자 적어본다.

온라인 성찬 가능한가? 내가 내린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다만, 곧바로 온라인 성찬을 수용하기보다 더 나은 대안이 없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성례전의 구성요소와 원리

1520년 루터가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로마가톨릭 교회의일곱가지 성례전을 비판적으로 다룬 이래, 일명 '프로테스탄트'로 불리는 거의 모든 개신교회에 선 루터의 결론을 받아들여 세례성만찬만 성례전으로 인정한다(성공회 제외). 루터가 이 둘만 성례전(Sacramentum)으로 보았던 공식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소급되는데, 공식은 아래와 같이 매우 간단하다.

말씀(그리스도의 명령)+물질+믿음=성례전

성례전에 있어서 이 세 가지는 결정적이다.

그럼 이것부터 생각해보자.

온라인 예배에 말씀이 없나?

물질(떡과 포도주)이 없나?

여기에 그리스도가 실재/임재하신다는 믿음이 없나?

이 세 요소가 충족된다면 온라인이라고 못 할 것도 없다. 다만, 전제조건이 있다. 성찬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은총의 도구(means of grace)라는 점이다. "공동체"라는 말에 주목하자. 모든 성례전은 교회라고 하는 거룩한 성도의 사귐’(communio sanctorum)을 지향해야 한다. 즉 오프라인 성찬이든 온라인 성찬이든,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지에 대한 교회론이다. 분명히,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이 점을 명확히 박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거룩한 장소는 신앙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건물이나 장소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움직이는 성막에서 성전이라는 고정된 건물과 장소에 제한되었나? 종교개혁 신앙도 동일한 맥락 위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정한 장소, 특정 직무자의 권위에 제한당하지 않는다. 개신교 최초의 교회 건축이라고 하는 토르가우 교회 입당예배(1545) 때 루터가 이런 설교를 했다. “우리가 모여 말씀을 나누고 성찬을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이런 화려한건물이 아니라 작은 샘 우물 곁이라도 충분합니다.” 교회건물이 필요한 이유는 그곳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성찬을 나누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황에 따라 신자들이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눌 장소는 변경될 수 있다. 요즘 같이 엄혹한 시기엔 거룩한 성도의 사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교회당이 아니라 가족이 모이는 ''이 된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교회는 우주적 교회(그리스도의 몸)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이 교회론적 관점은 한 식탁을 통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지향한다는 성찬신학에서 두드러진다.

 

세례와 만인제사장,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모든 교회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지향한다. 가정교회든, 개교회든, 교단이든 교파든 모두가 지향하는 목표점은 동일하다. 가정예배도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지향한다. 가정에서 성찬을 진행한다면, 거기서 나눠지는 말씀과 성찬은 더 큰 형태의 교회 공동체와 연결되어야한다. 가정교회는 자기가 출석하는 개교회나 지역교회를 지향하고, 지역교회는 같은 신앙의 노선을 지향하는 교단이나 교파를 지향하며, 교단이나 교파는 모든 다양성 가운데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는 그리스도의 몸, 즉 우주적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다.

온라인 성찬을 반대하는 어떤 신학자가 성만찬은 목사가 집례할 때 만 유효한 것처럼 설명하던데, 그것이야말로 개혁자들이 그리도 치를 떨었던 사제주의와 다른 게 무언가 싶다. 이런 관점이 치명적인 것은 세례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1-3세기 교회의 세례를 떠올려보자. 초대교회 모습을 전해주는 자료 중 2세기 중반 <사도전승>을 참조해자. 교인이 되기 위해선 자격에 대한 엄격한 문답을 거친 후 3-5년 동안 교육받고, 세례 과정에 들어간다. 부활절을 앞두고 입교예비자는 교회 공동체의 진지한 기도 가운데 물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의 한 가족으로 기쁨 가운데 받아들여진다. 당시엔 입교가 곧 세례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세례의 마지막 단계에 반드시 기름을 붓는 도유식이 있었다는 대목인데, 이것으로 세례가 완성되었다.

초대교회 세례과정을 가만 생각해보자. 물로 정결하게 씻고, 기름을 붓는 것은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을 세울 때 하는 과정과 동일하다. , 기독교는 세례로 입교하는 모든 사람을 왕과 제사장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이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말했던 세례 받은 모든 신자의 만인제사장직근거다.

간혹 이 세례 과정을 설명하면서, 초기 가정교회 건물인 시리아의 두라-유로포스를 언급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서, 꼭 빠지지 않는 말이 건물의 중요성이다. 딱 거기까지면 좋겠는데, 건물의 중요성이 말씀과 성찬과 같은 위치로 격상될 때는 문제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거 아니다. 게다가 이런 주장에 큰 약점은 초기 교회역사는 다양성이 훨씬 강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다는 점이다. 초기 교회는 예배와 예식, 예배 장소가 매우 다양했기 때문에 두라-유로포스를 초대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 꼽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말이 샜다. 여하튼 중요한 건, 기독교 세례는 모든 신자를 왕과 제사장으로 세우는 은총의 도구다.

그럼 모두가 제사장이라면, 개신교 목사는 뭔가? 필요없나? 그렇지 않다. 개신교회에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으로서 교회 내 위계는 거부되고, 서로 평등하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제사장으로 그 권위가 인정된다. 다만, 이 땅의 현실상 각각의 기능과 특수성이 인정된다. ‘우린 모두 왕과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조화와 질서 가운데 서로를 위한 각각의 특수한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 그것이 직분이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사도 예언자 교사 같은 직무겠고, 우리로 말하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이 된다. 조화와 질서라는 원리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속한다.

세계--존재로 살아가는 교회는 세계-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의 밥심’(먹거리)으로 살아간다. 루터교회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목사에겐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고 성례를 바르게 집례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다(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7). 모든 신자가 예배 시간 한 장소 안에서 내가 설교하겠다고, 내가 성찬 집례하겠다고 설교대 앞으로 뛰쳐 나오면 난장판이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는 목사를 세워(청빙) 말씀과 성례전의 임무를 위임한다. 그러 니교회내 모든 직무의 권능은 원초적으로 목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것이다. 어떤 일도 목사 맘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세례받은 모든 신자는 기름부음 받은 왕이요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성찬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다. 건물도 아니고, 목사가 있고 없고도 교회의 정체성에 있어서 결정적이지 않다. 모든 신자의 모임은 말씀과 성례전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지향해야 한다. 따로 떨어져 있길 고집한다면, 그게 이단이고 섹트(sect).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개교회 모임이 불가능하다면, 가정교회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지향해야한다. 가정이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곳에도 말씀과 성찬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집례자인 목사가 없다면, 가족 중 대표가 하면 집례하면 된다. 그게 개신교 정신 아니던가? 가족 중 한 사람이 대표가 되어 예배 집례자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그 집례에 따라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한다. , 그럼 이 원리를 온라인 예배와 온라인 성찬에 실제적으로 접목시켜보자. 여기서 예배가 무엇인지 신학적인 논쟁을 하면 끝도 없이 길어지니, 이하에서 논하는 내용은 각 교회의 주일 예배 의식에 준하는 것으로 편의상규정하자.

결론부터 말한다. 앞서 말했던 것 반복한다. 온라인 성찬 가능할까? 내 답은 가능하다.’ 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앞서 성례전 공식을 말하면서 세 가지 요소를 언급했다.

말씀(그리스도의 명령: 제정의 말씀), 물질(/떡 포도주), 믿음.

온라인 예배 대신 가정예배를 직접 진행하고 있다면 성찬은 매우 간단한 문제다. 가족이 나눠하면 다 가능하다. 설교는 아빠가 하고, 성찬집례는 엄마가 해도 된다. 교회 목사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이제껏 제자훈련하고 성경공부 했던 거 바로 이런 때를 준비하려고 그렇게 용쓴 거 아니었나? 물론, 교회 다니는 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가정예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배 집례를 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홀로 사는 분도 있고, 직접 예배 집례하는 걸 어려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라면, 각 교회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예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기도 말씀 찬송. 모두 화면 보면서 따라가면 된다. 문제는 성찬이다.

이제부터는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의견이니 다양한 의견이 교차하면 좋겠다. 온라인 성찬이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이 물질과 결합되었으니, '물질성이 있어야 한다'는 대목이다. ‘물질을 통한 공동의 식탁 사귐을 성찬의 핵심으로 보는 관점이다. 한 떡에서 떼어나누지 않으면 성찬이 아니다는 주장이다. 그건 교회의 공동체성에 위배된다는 말이다. 그럼, 이 대목에서 한 번 물어보자. 한 떡에서 떼어 나누지 않으면 정말 안 되는 건가? 그럼 교회 공동체가 아니란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럼 우리 교회 성찬 때 집례된 떡과 잔만 유효하고 다른 교회 거는 모두 가짜인가? 한 식탁, 하나의 떡, 하나의 포도주가 우리 교회만 말하는 건가? ‘우리 교회 우리목사가 집례한 성찬만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게 사제주의, ‘섹트’(sect). 우리가 믿는 것은 목사의 입이나 떡과 포도주를 믿는 게 아니다. 성찬을 제정한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이전처럼 한 교회에서 모일 수 없다면,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면서 가정예배에서 성찬을 각자 집행하는 방식은 가장 좋은 성찬방식이 될 수 있다. 이 때 교회가 성찬예식서를 각 가정에 제공한다면 금상첨화다. 이런 가정예배 방식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교회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면 된다. 거기서도 성도의 사귐(교제)이 가능하다. 각 가정이나 개인은 떡과 포도주를 미리 준비하고, 방송을 따라 함께 나누면 된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이 성찬이 끝이 아니라 거룩한 성도의 사귐을 지향해야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온라인 방송을 진행하는 목회자는 성찬 예문에 따라 곁에 있는 사람과 성찬을 함께 나누고, 예문이 끝나면 방송을 보고 있는 교인들은 방송에 나오는 집례자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성찬 예식문을 미리 만들어 배포한다든지, 떡과 포도주를 교우들에게 심방하면서나눠준다든지 하는 방식은 바람직하다. 이런 준비를 통해 교회는 공동체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내가 루터교회 목사이니 루터말로 맺어야겠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우리가 하나로 이어진 그리스도의 몸이다. 거기야말로 물질과 영이 거침없이 상호 교환되며 신자들의 거룩한 사귐(communio sanctorum)이 일어난다.”

) 신앙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 성경 한 번 읽었다고 해서, 무슨 책 하나 읽었다고 해서, 무슨 목사 할애비라서 신앙이 형성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형성되는 신앙을 센수스 피데이’(sensus fidei)라고 불렀는데, 말씀 기도 찬송이 몸에 스며드는 지난한 일상, 그리고 우리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성찬의 신비가 물고기 비늘에 바닷물 스며들듯 체화되는 과정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우리 생명을 연장하던 성찬이 단절되었다. 참으로 성찬이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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