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온라인) 성찬은 가능한가?
인터넷 성찬은 가능한가?
아내로부터 지금 ‘인터넷 성찬’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논쟁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흐름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을 탈퇴한 고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인터넷 성찬이 어떤 양산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살폈다. 그리고 고신대 신학과 교수인 우병훈 교수의 [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를 읽어보고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적으려고 한다. 몇 개의 글을 읽었지만, 우병훈 교수의 글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일단 우병훈 교수는 ‘인터넷 성찬이 불가하다’는 입장으로 글을 적었다. 또한 급하고 개략적인 글이기 때문에 학문적 논문이나 글로 보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점에서 저자의 논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할 근거는 있어 보인다. 필자는 한국 기독 공보에 실린 [온라인 성찬 가능한가?]과 우병훈 교수의 [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에 논지의 비논리적인 것에 대해 비판할 것이며, 온라인 성찬은 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온라인성찬식
성만찬에 대한 성경적 근거에 대한 비판
일단 현재 코로나 사태에 대한 특수성을 전제하고 성만찬 논쟁을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을 망각하면 된다. 논쟁을 하면서 이 부분은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마땅히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성만찬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근거를 통해 성만찬에 접근하는 것은 비약과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럼 우병훈 교수가 제시한 성만찬에 대한 성경 구절과 논지를 살펴보자.
우 교수가 제시한 성경 구절들은 고린도전서 11:23-34로 애찬과 성찬이 구분을 통해 초대교회가 성찬을 따로 준비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구절이다. 우 교수는 여기서 성찬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찬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다.
-성찬은 공예 배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성찬은 자신을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론
“이러한 결론에서 ‘인터넷 성찬’을 평가해 보면, 그것이 오히려 성찬 원래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는 아주 안 좋은 의식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판단은 아래의 신학적 근거들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결론은 ‘아니다’가 아닌 ‘아주 안 좋은 의식이 될 수 있다’이다. 필자가 보기에 위의 사항들은 인터넷 성만찬 논쟁이 갖는 특수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일반적인 예배와 장소에서의 성만찬을 성경적으로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병훈 교수의 성격적 근거는 전혀 ‘인터넷 성만찬 논쟁’과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실 인터넷 성만찬 논쟁의 핵심은 ‘하나의 빵’과 ‘공예배’라는 장소의 문제이다. 다른 것은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집례자와 치리의 문제는 지정학적 장소에서 드려지는 공예배라면 모두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떻든 우병훈 교수가 성만찬을 성례론적 관점에서 비판한 것도 정리해 보자.
-평신도가 집례 하는 성찬은 불가능하다.
-인터넷 성만찬은 성례론적 의미들을 왜곡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ㄱ. 서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찬이 지니는 풍성한 교제적 의미를 축소시킨다.
ㄴ.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이에게 정당한 은혜의 수단이 될까?
ㄷ. 엄숙한 가운데 성찬이 진행될까? 못 믿겠다.
ㄹ. 성찬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된다면 배제 되지 않겠는가.
“이상과 같이 성례론적 의미에서 보자면 ‘인터넷 성찬’은 매우 부적절하고 심지어 성찬의 의미를 훼손시킬 위험이 농후하다.”
반론1, 집례자는 목사이어야 하는가.
이 부분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먼저 ‘평신도’라는 표현은 어디서 온 것일까?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루터는 중세 가톨릭 사제였다. 그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루터교)를 만들었고, 그는 중세의 사제로서 집례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지금 가톨릭의 사제가 개신교 교회 안으로 들어와 집례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 또한 루터는 특수한 상황에서 평신도가 다른 신자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론의 핵심이다.[폴커 라인하르트 <루터:신의 제국을 무너뜨린 종교개혁의 정치학> (제3의공간)] 칼뱅 또한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반드시 목회자가 성찬을 집례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사 속에서 교회의 조직과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지 성경적 근거는 없다. 사도행전 안에서 특별한 직책의 사람들이 성찬을 주도했다는 그 어떤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러한 점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반론2, 염려와 죄는 다르다.
우병훈 교수는 인터넷 성찬을 진행할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염려’가 논지의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심히 ‘염려스럽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부터 시작된 열린 예배 논쟁이나, 교회 안에 피아노와 오르간 외에 다른 악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르신들을 ‘무척 염려하셨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어느 누구나 답을 주지 못했고, 지금 이러한 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꼰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염려는 염려일 뿐이고,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염려로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론3. 하나의 빵에 대하여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쭙고 싶다. 교인들이 100명 1000명이 넘어가는 교회는 하나의 빵을 사용하고 있는가? 없다. 어떤 교회에서 실제로 시도한 적은 있다고 들었지만 그냥 한 번 해 본 것일 뿐이다. 어느 교회도 하나의 빵으로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제과점에 구입한 카스테라 등의 빵을 미리 잘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처소에서 다른 빵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학적 비판을 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론4. 사적 성찬에 대하여
필자는 ‘사적 성찬’이란 단어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분명 인터넷을 통해 함께 목회자의 인도 하에서 성찬을 거행하는데 ‘사적’이라는 표현은 오용이다.
결론
우병훈 교수의 염려는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필자 역시 성급한 성만찬 진행은 위험해 보인다. 또한 굳이 인터넷으로 성찬식을 거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특수한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가 되듯, 온라인 또는 인터넷 ‘성찬’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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