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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발이 요단 강에서 젖을 때(수 3:1-24)

샤마임 2010.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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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발이 요단 강에서 젖을 때(수 3:1-24)

  김정우교수

총신신학대학원 구약학

 

이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앞에 섰다. 그들에게는 가슴이 설레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곧 성취되려고 한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집트 생활을 끝내었고, 지난 40년 동안 떠돌아 다니던 광야 나그네 생활도 끝내고, 드디어 약속의 땅 앞에 서게 되었다. 인생과 역사의 한 매듭을 짖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인가.     

이제 돌고 돌지만 목적지가 없던 방황이 종식되었다.     

이제 애쓰지만 도달하지 못하던 일이 종식되었다.

눈으로 보고 걷던 시대가 종식되었다.     

과거의 실패를 늘 상기해야 하던 시대가 종식되었다.    

기업을 얻지 못하는 두려운 시대가 종식되었다.
        

1. 여전히 준비하는 여호수아(3:1-5) 

이 시점에서 우리가 여호수아였다면, “나를 따르라, 돌격 앞으로”를 외쳤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주님께서 지난 40년 동안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는데,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그런데 여호수아는 계속 시간 만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3:1). 그는 1-2장에서 계속 준비만 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1:11에서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진중에 두루 다니며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고 전하게 하였다. 그는 1:12-18에서는 요단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얻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함께 무장하고 앞서 건너가서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제 2장에서는 정탐꾼을 보내어 여리고의 내부 사정을 다 보게 하며 첩보전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싯딤을 떠나 요단으로 나아온다. 준비를 모두 끝내고 행진을 시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치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길이다. 세상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전투도 철저한 준비가 없이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준비를 다 마치고 요단 강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새로운 새로운 도전과 장벽 앞에 서게 되었다. 3:15을 보면,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말한다. 그들은 불가능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건너갈 수 없는 강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때 이스라엘 군인들은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과 함께 작전을 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전형적인 장면이다.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오게 될 때, 뒤에서 바로의 군대가 추격하였고, 그들은 홍해 앞에 서게 되었다. 그 때 백성들은 크게 동요하면서,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라고 원망하였다. 


        그러나 이제 요단 강 앞에 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그들은 전혀 동요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40년 광야생활 동안 새로운 세대의 믿음이 자랐다. 바로 이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말한다. 성결함은 영적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는 것이다.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사랑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영적인 갱신을 요청하고 있다. 영적인 에너지가 없이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불타고, 우리를 능력으로 채우신다. “굼실거리는 요단 강의 절망 앞에서 여호수아는 성결함을 요구한다.” 


        나아가 여호수아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기사’란 ‘크고 놀라운 일’로서 보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전율을 일으키는 일을 뜻한다(신 10:21, 삼하 7:23).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큰 기사”를 기다리고 준비해 왔으며, 이제 다 함께 이 믿음을 갖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들은 옛 조상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이제 큰 일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확고하게 믿고 있다. 
        

2. 법궤를 따르는 백성(3:7-13) 

 요단 강을 건너는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니라 제사장들과 법궤이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들을 통해 백성에게 말한다. 
 3:3,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3:6,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3: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3: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4:10, “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요단 가운데 섰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출 13:21).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법궤이다(민 10:33). 이제부터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더 이상 이들을 인도하지 않고 법궤가 중심 역할을 한다. 이 법궤를 따를 때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다”(3:3). 그러나 법궤를 따를 때, 그들은 생전 처음 가는 길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지의 세계로 안전하고 확실하게 인도해 가실 것이다. 


그들이 따라야 할 법궤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로 불려지고 있다(3절). 이 궤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맹세와 약속이 담겨 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준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 언약은 변할 수 없다. 그분은 거룩한 분이고 거짓말하지 않는 분이다. 이런 하나님이므로 그들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법궤를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약속을 기억한다. 


또한 이 법궤는 ‘온 땅의 주의 언약궤’이다(11절). 여기에서 ‘온 땅’은 가나안 땅 전부나 혹은 온 세상의 땅을 가리킬 수 있다. 주님께서 온 땅의 참된 소유주이시며, 자신의 뜻을 따라 나누어주실 수 있다. 주님께서 필요하다면, 부적절한 백성들을 쫓아내실 수 있다(10절).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이 일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10절하). 여기에서 세 번째 ‘알다’가 나온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 

        이스라엘은 배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리를 만들 시간도 없었다. 
        법궤가 길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법궤는 마술 상자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특별히 나타난 것이며, 변함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언약의 궤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은 무서운 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여호수아는 “너희와 그 사이에 상거가 2000규빗(약 900미터)이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하지 말라”고 명한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올바른 거리를 두고 나아가게 한다. 올바른 거리를 두고 따를 때,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4절)고 말한다. 우리가 법궤를 끌고 갈 수 없다. 우리는 법궤 앞에, 위에,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따라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길이 보일 것이다.’ 
        

3. 갈라진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3:14-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는 본문에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직역하자면, ‘요단에 서라’(‘amad)는 뜻이다. 
        3: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karat) 쌓여 서리라(‘amad)”
        3:15,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3:16,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amad) 쌓이고(qum)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karat)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abar)”1)
        3: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amad)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여기에서 ‘서다’와 ‘끊어지다’와 ‘건너다’가 핵심단어로서 반복되고 있다.2) 즉,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물을 밟자마자, 요단 강이 뒤로 물러가기 시작하였으며, 중앙에 서자 물은 큰 댐을 이루며 먼 곳 아담에 댐처럼 우뚝 서게 되었고, 사해로 내려가는 물은 완전히 끊어져 백성들이 건너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제사장도 서고, 물도 서고, 백성들만 건너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제사장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요단 강물이 앞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제사장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거스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발을 물에 디뎌야 한다. 그들의 발을 적셔야 주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우리는 발에 물도 적시지 않고, 주님께서 큰 일을 하도록 기다릴 때가 많다. 그들은 발을 물 속에 집어 넣어야 했으며, 점점 더 깊이 들어갔어야 했다. 믿음은 이런 성격을 띠고 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나를 부인하고 나의 죽음을 각오하고 강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요단 강물이 물러가는 것은 제사장의 헌신 때문이라기 보다, 법궤의 거룩성 때문이다. 요단 강도 법궤의 거룩성을 알고 멀리 물러간다(16절, ‘멀리 아담까지’). 강물도 법궤를 가까이 할 수 없음을 알고 자연의 모든 질서를 거슬리면서 뒤로 물러가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 점을 포착하였다(114편).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천지의 격변이 일어났다. 

        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4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6 너희 산들아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 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여호수아의 군대가 요단 강을 건넌 사건은 모세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동일하다(출14:21). 옛날에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마른 땅을 건넌 것처럼 여호수아도 요단을 가르고 마른 땅을 건넌다. 하나님은 강과 바다를 나누고 마른 땅을 만들어 자기 백성을 통과케 하시는 분이다. 이 모티프는 구약성경에서 계속 나타나는 중요한 구속사적 모티프이다.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신다”고 말한다(1:4). 바다와 강을 정복하는 모티프는 시편 속에서 창조와 구속의 맥락에서 계속 나타난다. 바다와 강은 하나의 쌍으로 창조를 방해하는 혼돈의 세력으로 구약성경에서는 나온다. 첫 창조에서 혼돈의 물이 세상을 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을 모으시고 마른 땅을 만드신 것 처럼,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요단 강을 가르고 나오고 있다. 옛 세상이 물에서 나온 것 같이 새 백성이 물에서 나온다. 이리하여 홍해와 요단 강 도하는 구속사의 중추적 사건이 된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 기사를 묵상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다”(고전 10:1-3)고 말한다. 옛날 모세의 지도 하에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를 바고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처럼, 이제 40년이 지난 후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요단 강에서 다 세례를 받고 있다. 이리하여 그들의 경험과 우리의 경험이 일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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