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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 고전읽기] 마르틴 루터의 생애(Ⅲ)

by 하늘땅소망 2019.06.30

[기독교 고전읽기] 마르틴 루터의 생애(Ⅲ)

 

루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제2기에 속하는 1517-1525년입니다. 1517년은 루터가 95개조를 발표하여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사건이며, 1525년은 루터의 유배생활과 더불어 농민전쟁이 일어나 루터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시간입니다. 또한 루터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간이며,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이 힘을 쓸 수 있도록 신학적 작업을 이룬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농민전쟁을 통해 명백히 루터가 루터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가장 왕성하고 중요한 시기를 단지 몇 페이지로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후에 루터의 저작들을 검토하면서 왜 루터가 그런 결정들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터는 창의적 신학을 제시한 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존 위클리프와 후스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고, 특히 에라스무스의 성경 해석과 인문학적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탁월함은 흩어진 신학적 주제들을 오직 성경으로라는 전제 아래 다양한 해석학적 장점을 모아 이신칭의라는 걸출한 종교개혁의 모토를 제시한 것입니다. 만약 루터가 좀더 개혁적이고 이성적이었다면 칼뱅을 능가하는 신학자로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가톨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감성적인 성향 때문에 그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성향이 적지 않게 드러납니다. 시를 좋아하고, 음악을 즐겼으며, 성상과 이미지에 대한 그의 옹호는 후대의 철저한 개혁자들의 비판의 이유가 됩니다. 루터가 만약 칼뱅의 후대에 태어났다면 탁월한 종교개혁자의 면모를 드러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터를 적절하게 사용했고, 적절한 시기에 그의 길을 마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루터의 생애를 살펴 볼 것입니다. 세 번째 시간은 농민전쟁부터 그의 죽음까지의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필 것입니다. 이 시기의 1529년에 츠빙글리와 있었던 마르부르크(Marburg)의 실패였습니다. 이 회담의 결렬로 인해 루터는 루터교 안으로 침전되고 츠빙글리는 전쟁에 나가 죽음으로 종교개혁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수많은 개혁가들을 예비하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3: 종교개혁 확산과 죽음(1525-1546)

 

루터의 종교개혁가로 산 시간은 30년입니다. 151795개조를 발표하고 1546년 그의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여행 중 숨을 거두었습니다. 루터의 3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사건을 먼저 언급하고자 합니다. 152371, 브뤼셀에서 루터가 소속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하인리히 뵈스(H. Voes)와 요한 폰 에센(J. von Eschen)이 화형을 당합니다. 두 수도사는 루터의 친구였던 야곱 프롭스트 수도원장의 설교를 듣고 종교개혁에 매료되어 개혁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속했던 네덜란드 안트베르펀(Antwerpen) 수도원은 루터의 책들을 지방의 언어로 번역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수도사들은 브뤼셀 종교 재판소까지 끌려가 취조를 받게 됩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모두 자신들의 신앙을 취소했지만 두 사람은 악랄한 고문에도 신앙을 거부하지 않고 순교를 택합니다. 루터는 그들의 순교 소식에 슬픔을 금하지 못합니다. 루터는 친히 환난 가운데 있는 브뤼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위로의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이러한 기쁨에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 너희만이 몫을 감당한 것은 아니며, 너희는 가장 앞선 자들이 되어, 우리는 그 곳에서 그 놀라운 기쁨과 희열을 누렸다. 모든 만방에 복음을 들려주며,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두 사람은 첫 열매가 되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 불안 그리고 창피를 당하고, 위기와 고난 그리고 감옥에 처했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써 신앙의 열매들과 강함을 보여주었다. 브뤼셀에 사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찬송이 된 하인리히와 요한네스를 가졌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께 찬양을 돌렸다. 우리는 진실로 이 시대 거룩하고 참된 순교자를 보았고, 들을 수 있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실로 지금까지 엉터리 성인들을 높였고 경배했다. 그러므로 나의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뻐하기 바란다.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고 시작하신 그의 거대한 이적과 기적에 감사하자.”(주도홍 <처음 시작하는 루터와 츠빙글리>(세움북스)에서 인용)

 

또 하나의 위기는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었습니다. 1520년 츠빙글리가 개혁하던 취리히에 흑사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츠빙글리는 살아남아 나머지 개혁을 이루어갑니다. 1525년에는 브레슬라우에도 흑사병이 돌고 결국 1527년 루터가 거하던 비텐베르크에도 흑사병이 찾아옵니다. 어쩌면 루터에게 있어 흑사병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영적 흑사병인 중세가톨릭과 폭력으로 혁명을 달성하려 했던 급진적 재침례파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종종 재침례파를 하나의 집단으로만 보려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후에 다루겠지만 재침례파 안에도 다양한 색이 있으며, 비폭력 저항을 통해 순교적 삶을 살았던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관적 성령을 따르고, 유아세계를 거부하며 기존의 정치권력을 강하게 부정했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집단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1525년 전후로 하여 루터의 주변은 큰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유럽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농민전쟁이 막을 내리자 또 하나의 폭풍이 루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의 알을 품었던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초기의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지지했고, 루터 역시 에라스무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루터로 인해 세상이 요동치고, 루터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과격한 양상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자 에라스무스는 난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소심한 성격에 그가 야만적이라고 비판했던 금욕적이고 반세속적 중세 신비주의 성향이 에라스무스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격한 루터에게서 한발자국 물러나고 싶었고, 더 이상 루터와 자신이 엮이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비록 중세 교회의 부패를 인지하고 비판했지만 굳이 떠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수입이 중세 교회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점점 자신을 멀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영국와 헨리 8세는 에라스무스에게 루터와 단호하게 결별할 것을 조언했고, 이것이 결국 그 유명한 자유의지 논쟁을 발전하게 됩니다. 농민전쟁으로 인해 일반 농민과 서민들을 잃었다면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은 수많은 인문학자들을 잃게 됩니다.

 

1524년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세 가톨릭에 남아 있기 위해 루터를 공격하는 <자유 의지에 관하여>를 씁니다. 에라스무스은 만약 하나님이 자신이 스스로 만든 구원의 조건을 인간 스스로 도달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못 박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아무런 노력도 수고도 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지성적 활동 없이 구원을 받든지 지옥에 떨어지든지 할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자율의지 또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루터는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위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루터의 인간론에서 후대에 만들어질 도르트 신조(1619)의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라스무스의 글을 읽은 루터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저 몇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자유 의지에 대한 이 작은 책을 내가 얼마나 혐오했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학식 있는 사람이 쓴 학식 있는 책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 될 것입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뱀장어이며, ‘교활함과 악으로 충만한자로 표현하며 그의 주장들을 역겨워합니다. 루터가 보기에 에라스무스는 말을 매끈하게 잘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제시하는 도덕주의자일지 몰라도 그는 결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는 않는 자였습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와 논쟁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에라스무스가 죽자 루터는 그에 대해 마지막 평가를 내립니다.

 

로레르담의 에라스무스는 다수의 비범한 책들을 저술했습니다. 에라스무스에게 그럴 만한 지적인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공식적인 어떤 의무도 없었고, 설교하지도 않았으며, 강의의 부담도 없었고, 사업에 분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 없는 삶의 방식을 추구했고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종의 도움이나 주의 만찬의 집례도 요구하지도 않았고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의 보증을 믿고 살았으며 그것을 믿고 죽었습니다.”

 

루터가 보기에 에라스무스는 하나님 없이 살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현저한 특징이 분명합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은 칼뱅과 청교도, 그리고 후대의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루터의 자유의지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는 성경이기는 하지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 개념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1524109일 루터는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수도사 의복을 벗었습니다. 공식적인 수도사 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1525613, 루터는 수도원을 나온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일 년 후인 15277월에 아버지가 됩니다. 결혼식을 치른 두 카타리나는 큰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수도사와 수녀가 만나 나은 아이는 괴물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건강했고, 건강한 아이를 본 후에야 카타리나는 안심하게 됩니다. 아이는 루터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요하네스(Johannes)’이라 부릅니다. 루터가 43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서 8년 동안 6명의 출생합니다. 그러나 1527년에 비텐베르크를 덮친 흑사병으로 인해 살아남았지만 그해 낳은 딸 엘리자베스를 8개월 만에 잃고 맙니다. 루터는 슬픔에 압도당하여 자녀를 보내는 슬픔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전에는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1540122, 일곱 번째 아이를 낳았지만 사산하고 맙니다. 카타리나 역시 그로 인해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1542년에는 열세 살이었던 막달레나가 2주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막달레나를 보낸 후 루터는 요나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딸 막달레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나의 아내와 나는 반드시 육신과 세상과 이슬람교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된 이 놀라운 죽음, 축복스러운 마침에 감사해야 마땅하지만, 자연적 사랑의 힘이 너무 강해서 눈물 없이, 우리의 마음의 고통 없이 실제로 우리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끼지 않고는 그녀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의료과학이 원시적이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어린 아이들의 죽음은 종종 일어났으며, 루터의 가정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세 명의 아이의 죽음은 루터로 하여금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이끌었음은 분명합니다. 1526년부터 1527년 사이 루터는 주의 만찬 논쟁으로 인해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아마도 루터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그가 정확하게 중세 가톨릭과 종교개혁 어느 중간에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어느 교수는 루터를 사회적 측면에서 미완의 종교개혁가로 말하지만, 그것은 당시 상황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루터가 비록 이신칭의와 자유의지 논쟁에서 종교개혁의 기본 토대를 제시했지만 전반적인 측면에서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성만찬론을 보면 그가 아직 중세 가톨릭 신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루터는 중세 교회가 주장한 화체설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공재설을 주장합니다. 결국 기념으로만 보려고 했던 츠빙글리와 결별하게 됩니다. 성만찬 논쟁은 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성만찬 논쟁이 일어날 때 유럽은 폭풍 속에 있었습니다.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1529)에서는 보름시 칙령이 재개됩니다. 1521년 루터를 정죄했던 보름스 회의는 칼 5세에 의해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은 선언합니다. 그러나 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1526) 때 황제는 다시 보름스 칙령을 시행하도록 명령합니다. 이 때 루터를 따르던 일부 제후들이 반기를 들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바라고 하나님과 황제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한 종교를 따르라고 한발 물러섭니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가 어떤 종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종교가 선택되어집니다. 루터를 따르던 영주들이 지배하는 곳은 루터식의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가톨릭을 따르는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루터식 예배는 불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1529)에서 보름스 칙령 즉 가톨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엄밀하게 강제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 예배는 어느 나라든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을 따르는 영주가 다스리는 곳은 루터식 예배는 불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억지스러운 주장에 루터를 따르던 제후들과 도시들은 회의의 선언을 따르지 않기로 하고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저항자들이란 뜻을 가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생겨납니다.

 

황제는 이슬람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위협하며 공격해 오는 마당에 서로 다른 종교적 관념으로 인해 불화를 겪고 있는 제국을 통치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칼 5세는 비록 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루터의 의해 주도된 아우크스부르크 고백을 제출했고, 츠빙글리는 따르는 스위스 사람들은 또 다른 문서를 제출하여 개신교 안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15314월까지 기한을 주고 철회하도록 했습니다. 개신교도들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개신교 제후들은 슈말칼덴에서 서로 합의하여 연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성만찬 논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국제적 상황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개신교를 따르던 제후 필리프는 루터와 츠빙글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만나 성만찬 문제를 합의하도록 주선했습니다. 101, 루터와 외클람파디우스가 만나고, 다른 방에서는 멜랑히톤과 츠빙글리가 서로 조율하기 위해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한 방에서 식탁을 중심으로 두 대표와 주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토론을 하게 됩니다. 거의 대부분에서는 서로 합의를 했지만 마지막 15번째에서는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 모임의 이유이기도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갈 때 루터는 스위스 대표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도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루터가 아내 카타리나에게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폼머(부겐하겐의 별칭) 씨에게 소식을 전해 주시오. 아주 좋은 논쟁이 있었다고. 츠빙글리는 말했소. 육체는 장소 없이 존재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몸이 빵에 있을 수 없다고, 외콜람파디우스는 말했소.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라고.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여,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했다고 생각하오. 나의 많은 노력에도 어쩔 수 없었소.”(주도홍)

 

후에 칼뱅이 등장하여 성만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루터교와 개혁파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물론 칼뱅의 공로에도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에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현대인들에게 중요하지 않는 성만찬 문제를 그토록 길고 세세하게 다루어야 했는지 이 사건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이 일로 인해 마음이 극도로 상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인정하려 하지도 않았고, 1531년 츠빙글리의 죽음조차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루터가 의외로 감정적이고 편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만찬 논쟁은 서로가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개신교 연합은 깨지고 말았고, 츠빙글리는 전쟁에서 전사함으로 개혁교회는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루터 역시 이 일로 인해 루터만의 종교, 독일인만을 위한 협소한 의미의 종교개혁으로 축소되고 맙니다. 이제 츠빙글리와 그의 후계자들은 개혁주의자(the Reformed)들로 불리게 될 것이고, 루터와 그 후계자들은 루터주의자(Lutheran)들이 됩니다.

 

황제는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던 개혁주의자들과 루터주의자들을 모두 말살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얼마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불과 1년 만인 15327월 휴전을 하게 됩니다. 이슬람이 유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을 통해 공공의 적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칼 5세는 개신교 제후들을 이간질하기 시작합니다. 5세의 꼬임에 넘어간 개신교는 분열하여 결국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리드리히와 헤세의 필립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를 발표한지 만 30년이 지난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은 완전히 종말을 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명의 군주가 아닌 개신교에 속한 온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황제와 대항하게 됩니다. 5세를 견제하던 프랑스와 손을 잡고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황제는 패배했고, 거의 사로잡힐 뻔합니다.(1552)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회의가 진행됩니다. 이 제국 회의는 완전한 전쟁 종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종교와 정치에 대한 중요한 기준을 세우게 됩니다. 수개월 동안 토론을 통해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의 신앙에 의해 그 땅에 거하는 백성들은 동일한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종교를 이유로 다른 영주를 침범할 수 없으며, 자신의 종교를 이유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과 루터교에 한정되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프로테스탄트와 재침례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후에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것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The Peace of Augsburg)라고 명명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있기 9년 전인 1546218, 5세가 루터교 연합인 슈말칼텐 연합을 공격한 그해 루터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만스펠트의 두 백장이 심각한 대립 상태에 봉착하자 루터는 그들에게 달려가 화해를 종용합니다. 겨우 그 일을 마치고 고향인 아이슬레벤에서 노쇠한 몸에 무리하게 몸을 사용하여 감기에 걸립니다. 루터는 말년에 극도로 유대주의자들을 혐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1525년부터 반유대주의자가 되어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루터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유대인들이 많아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는 죽기 전 사흘 동안 계속하여 유대주의를 공격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우리의 형제로 여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의 원수들이다.”

 

숨을 거두기 얼마 전인 21일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터는 가브하르트와 알브레히트 두 백장이 서로 비방하다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 됨의 상징으로 알브레히트가 보내온 송어를 아내에게 선물로 보냅니다. 4년 전 사랑하는 딸 막달레나의 죽음 이후 루터는 깊은 우울증에 사로잡혔습니다. 외부적 상황도 루터가 보기에 그리 좋았습니다. 어쩌면 요한이 밧모섬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교회의 모습을 보는듯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모든 생의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자신의 열정을 불살라 성경에 헌신했던 루터는 2546218, 가족이 있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인 아이슬레벤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루터가 숨을 몰아쉬며 남긴 마지막말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는지 보여줍니다.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셨나이다. 당신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루터는 요한처럼 종말에 대한 환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세계사를 바꾸고 지도를 바꿀 만큼 지대했습니다. 교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잡아 주었고, 후대의 종교개혁가들이 쉽게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습니다. 종종 간과되기는 하지만 루터는 문학적 기질과 음악성이 탁월한 독일어 성경은 독일문학에 길이 남을 역작이 되었고, 그가 만든 찬송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려 지게 됩니다. 어느 독일 역사가의 말처럼 3백 년 동안 루터를 바로 이해한 사람은 독일의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뿐이었습니다. 그만큼 루터는 음악을 사랑했고,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기를 즐겼습니다.

 

이제부터는 루터의 중요한 저작들과 신학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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