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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 고전 읽기] 얀 후스의 생애와 사상

by 하늘땅소망 2019.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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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의 생애와 사상

 

1. 얀 후스의 생애

 

위클리프의 사상은 중세 교회에서 상상하기 힘들만큼 혁명적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도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진보적 주장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여명을 밝혀준 위클리프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위클리프로 인해 중세는 새로운 각성과 인식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중세를 보완하고 수정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교회를 만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 마지막 주자가 바로 얀 후스입니다. 위클리프가 중세 교회에 종교개혁의 여명을 밝혀 주었다면, 얀 후스는 빗장을 연 사람으로 칭송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미미하게 받았지만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얀 후스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위키디피아 ‘얀 후스’와 두란노아카데미에서 출간된 기독교 고전총서 13 등을 참고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얀 후스는 남 보헤미아 후시네쯔에서 태어납니다. 기록이 없어 1369년 또는 1973년 사이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그가 성직을 받을 때가 1372년인 것을 기준으로 하여 역추적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그의 부모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서 수학합니다. 1393년 학사에 해당하는 학위를 받고 1396년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1400년부터 대학에서 교양 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일하며 가톨릭의 사제가 됩니다. 프라하의 성 미카엘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1402년 3월 14일부터는 베들레헴 성당에서 설교자로 활동합니다. 1401년에는 철학부의 학장을 맡고, 1년 후에는 대학의 총장이 되어 체코인들이 독일의 힘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합니다. 프라하 카렐 대학의 지도적인 교수였던 얀 후스는 라틴어 뿐 아니라 체코어로도 적지 않는 저술 활동을 합니다. 체코어를 개량하고 철자법을 개혁하여 체코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썼습니다. 설교와 저술을 활동을 통해 교회가 타락했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이제는 타락을 청산하고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프라하 카렐 대학의 교수 뿐 아니라 왕실과 일부 귀족, 그리고 수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과 프라하의 독일인들을 반발합니다. 얀 후스로 인해 카렐 대학은 독일인 교수와 체코인 교수 간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1409년 바츨라프 4세의 크트나호라 칙령으로 1348년 카렐 4세가 국제주의적 원칙에 입각, 배분한 민족구성이 재조정되어 대학의 주도권이 체코인 교수들에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결국 독일인 교수들과 학생은 불만을 품고 카렐 대학을 떠나 라이프치히에서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다르게 대중들에게 설교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들을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하여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소귀족들과 도시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1412년에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면죄부 판매는 성경적이지 않으며 교회의 배만 부르게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후스의 비판에 심정이 상한 가톨릭교회는 바츨라프 4세를 충동질하여 후스를 프라하에서 쫓아냅니다. 남부 체코의 코치흐라데크에서 지내게 된 후스는 농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비판하며 평신도 중심의 운동을 이끌어 나갑니다.

 

후스의 죽음은 어처구니없이 허망했습니다. 1414년 10월 스위스 콘스탄츠에서 종교회의가 열립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다 바츨라프 4세의 동생인 지기스문트는 안전을 보장해준다며 종교회의에 참석하도록 요구합니다. 후스는 자신의 논변을 통해 고위 성직자들을 설득 시키리라 확신하며 참여합니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하자마라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고문을 당합니다. 결구 한 해 후인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집니다.

 

2. 얀 후스의 업적과 영향력

 

얀 후스는 존 위클리의 후대 사람이며,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로인해 적지 않은 학자들은 얀 후스를 존 위클리프의 그림자 수준으로 이해하려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존 위클리프의 얀 후스가 전혀 다른 성향과 배경을 가진 사람인 것을 강조하며,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종속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존 위클리프의 경우 왕과 귀족들의 보호아래 활동했다면, 얀 후스의 경우 주변의 교수들과 평신도들을 통해 개혁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위클리프가 내세운 만인 제사장설은 얀 후스의 경우 외형적으로 사제와 평신도는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후스는 교황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를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제시합니다.

 

-교황이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지키는 경건한 자를 무시한다면 거절해야 한다.

-교황 자신이 경건하지 않고 세상적인 일에 얽매인다면 거절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세상의 방법으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운다면 거절해야 한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탈취한다면 거절해야 한다.

 

현대인에게 체코는 소련에 대항했던 자유 항쟁과 그것을 배경으로 한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프라하는 ‘혁명’이란 단어를 사랑하며, ‘자유’를 위해 살아가는 곳입니다. 공의회가 후스를 처형하자 체코인들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깊은 불만과 항거의식을 공유합니다. 결국 1415년 가을 귀족들이 연대하여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후스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결의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며 항거였습니다. 이들은 즉각적으로 성약 성경에 근거하여 빵과 포도주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포도주를 담은 성작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될 만큼 강력한 상징을 가졌습니다. 갈등은 점점 깊어져 얀 젤리프스라는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면서 시 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던지는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이 일어나입니다. 시위가 있은 후 며칠 후에 바츨라프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3. 나가면서

 

얀 후스의 신학적인 업적과 역사적 사건의 진행은 다음에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얀 후스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얀 후스의 탄생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기 전에 이미 체코에서 불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중세는 불가피하게 종교개혁을 요구하고 있었고, 역사는 새로운 시대적 인물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터에 의해 일방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되지만 역사를 조금만 깊게 살펴보아도 루터도 적지 않은 선대의 개혁자들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위클리프가 아니라 얀 후스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얀 후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별처럼 빛는 믿음의 사람들을 준비하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한 사람의 증언은 힘을 갖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이상의 증언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얀 후의 저작물을 통해 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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