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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주목신간] 예수는 거지다

샤마임 2018.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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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주목신간] 예수는 거지다


예수는 일하지 않았다. 아니 일했지만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일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의 일하지 않음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 뜻하지 않게 한 권을 책을 접한다. 아직 직접 읽은 책은 아니다. 내용이 특이해 출판사 소개글을 읽으니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다. 목사인 저자가 4박 5일 동안 겪은 노숙체험기다. 저자는 김완섭 목사다. 내용이 얼마만큼 깊고 의미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문득 오래 전 홍성사에서 출간된 이천우 목사의 <각설이 예수>가 생각이 난다. 이목사는 11살 때 계모의 학대를 이기지 못해 가출한다. 각설이가 되어 오랫동안 살아가다 예수님 만나 극적인 변화를 격는다. 그는 이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은 먹고 남은 쉰 밥을 주지만, 가난한 이들은 자기 먹는 밥을 나누어 준다."


부자들은 왜 쉰 밥을 줄까?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핍절함을 알지 못한다. 게으리기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빈곤을 인격과 연결시킨다. 그가 주는 쉰 밥이 그 증거다. 무가치한 인간에게 쉰 밥을 주는 것도 아까운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먹는 밥의 일부를 준다. 핍절한 자들의 아픔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가 구걸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거지다. 일하지 않고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어떻게 생존이 가능했을까? 구걸했기 때문이다. 구절이란 표현은 분명 거북스런 표현이다. 특히 예수님께 이런 표현을 붙이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깝다. 그러나 성경에 직면에 보라 예수는 거지다. 


거지의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어 나갈 때, 우리는 소름끼치는 장면들을 만난다. 예수님의 심장을 '긍휼'이란 단어로 정의하는 하재성 목사의 <긍휼, 예수님의 심장>에 보면 예수님의 존재 자체, 존재 방식은 모드 '거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 '체휼'이란 표현을 사용한다.(한글 개역) 체휼은 긍휼의 다른 표현이며, 동일한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한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라고 조정한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기 보다 정죄하는데 빠르다. 제자들이 길거리에서 앉은 뱅이를 보고 누구의 죄냐고 물은 것처럼 우리 또한 타인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돌린다. 욥의 친구들 처럼 '네가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가? 예수님께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은 거지들이나 가난한 자들이 아니다.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 경건과 학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지만 타인에 대한 긍휼이 없는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신다. 이천우는 신학을 마치고 목회를 시작하지만 교회는 갈수록 퇴보한다.


"무력한 신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란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


우리는 어쩌면 예수를 모를 수 있다. 아니 만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거지셨기에 거지들과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의 아픔을 아셨다. 우리는 너무 배가 부르다. 지난 일 년을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버텨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배신과 모욕, 조롱을 겪어 왔다. 사람들은 비판은 쉽게 하지만 돕기는 더디한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돕는 사람은 욕하지 않는다. 돕지 않으면서 욕한다. 자격있는 사람은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나, 자격도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대로 되는 것처럼 말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목회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감이 오는 것 같다. 그런데 진작 내 자신은 목회에서 멀고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자격 미달인 셈이다. 2주 동안 직장을 구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거절이다. 그곳에도 텃새가 심하다. 오늘 거지 예수를 묵상하며, 왜 가난한 자들과 아픈 자들을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마태는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마 25:31-4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내가 주릴 때'이다. 그들이 아닌 '내가'이다. 예수님은 자신은 가난한 자들, 억울한 자들, 옥힌 갇힌 자들과 동일시 한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주변에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억울한 사람들의 편이 되라. 그들이 예수님이시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서면 지하상가 입구에서 웅크린체 구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각설이 예수>의 저자 이천우목사는 2014년 2월 28일 65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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