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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고전읽기] 어거스틴의 <고백록>

by 하늘땅소망 2017. 9. 21.

[기독교고전읽기] 

어거스틴의 <고백록>

*이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은 국민일보에 기고된 글입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참 행복을 주십니다.

행복이 뭘까요? 뉴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대중매체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 단어가 바로 웰빙이란 단어였습니다. 웰빙‘Well-Being’을 직역하면 잘 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웰빙을 단지 잘 사는 것만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새마을 운동을 기점으로 한강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근대화의 신화를 이루었습니다. 눈부신 경제발전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만 해도 시골은 수많은 사람들로 꽉 차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사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 한 사람 두 사람이 도시로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근대화 역사에 필수불가결하게 일어난 도시화였습니다. 도시화란 단어 속에는 성공과 생존이란 목적의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골에 있으면 기껏해야 농사 밖에 지을 수밖에 없어서 사람들은 자식들을 도시로 떠밀다시피 올려 보냈습니다


3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시티 드림(City Dream-아메리칸드림의 언어유희)은 산산조각 나듯 무너졌고 적자생존의 도시생활은 성공과 우울함을, 편리함과 불행을 함께 가져다주었습니다. 성공과 생존을 위해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은 삶의 허망함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행복을 미래에 얻을 복권처럼 생각했고,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며 현재의 불행을 견뎠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건 건강의 상실과 삶의 허무함이었습니다. 뉴밀레니엄은 그들로 하여금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행복에 집중했습니다. 이것이 뉴밀레니엄이 낳은 웰빙이란 단어의 출처입니다. 그러나 웰빙도 현대인들을 결코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잊힌 단어가 되었지만 웰빙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하며, 귀촌과 귀농이란 단어로 대체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행복을 찾아 여행하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사 속에 행복을 찾아 기나긴 여행을 떠났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입니다. 정식 이름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좋은 징조''덕망 있는'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어로는 어거스틴(Augustin)으로 부릅니다. 어거스틴은 교회사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교회사, 신학, 철학에서 그의 이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존재입니다. 그의 명성은 이 천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갈라진 신학과 믿음관을 통합한 신학의 저수지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신학은 어거스틴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그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거스틴도 초라하고 남루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공도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음과 동시에 성적 쾌락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팔아 버렸습니다. 성공할수록, 욕망에 빠져들수록 가슴은 더욱 허망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느낀 어거스틴은 종교를 찾아갑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17세에 북아프리카의 수도인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하며 수석을 차지할 만큼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정욕을 채워줄 한 여인과 동거를 시작합니다. 동거 중 한 아이를 낳아 이름을 아데오다투로 지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란 뜻입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삶에서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읽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통해 진리와 철학에 매료됩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내 마음을 아주 바꾸어 내 기도를 나의 주심이신 당신께 향하게 했고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욕구를 주었습니다. ... 나의 마음은 이제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려는 욕구로 가득 차 나는 당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키케로의 위대한 철학서는 어거스틴에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무리 깊이가 있고 잘 쓰인 책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이름이 없는 이상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는 없었다고 덧붙입니다. 더 깊은 공허함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시 성경 읽기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몇 줄 읽지 않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키케로의 화려한 문체와 철학적 사유에 비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문장들이었습니다. 수사학을 공부하고 있는 어거스틴에게 성경의 수수한 문체들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돌아가기까지 그는 충분히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의 갈망을 느끼는 단계까지는 왔지만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은 아직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스스로 나는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싫어했고, 교만의 헛된 바람으로 잔뜩 부풀어 스스로 어른이 된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거짓에 길들여지며 진리를 만나 고도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어거스틴은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합니다. 어거스틴의 영혼을 뒤흔들었던 종교는 앞으로도 계속해 영향을 미치게 될 마니교였습니다. 거짓은 진실과 근거리에 있습니다. 이단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끝이 약간 다를 뿐입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도들을 당신(하나님)의 이름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의 위로자이시오 보혜사이신 성령의 이름이 뒤섞인 말들로 재잘거리는 악마의 덫이라고 불렀습니다. 거짓은 참의 반대가 아니라 이웃과 같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의 영혼 속에는 그 어떤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깊은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듯, 종교의 반대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생각입니다. 미끼를 물 듯 어거스틴의 마니교의 교묘한 주장들과 현란한 말 솜씨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거스틴에게 마니교는 세상의 원리를 일깨우는 진리와 같았습니다. 마니교의 거짓말을 분별하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린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유혹에 빠져있을 때 어머니 모니카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진리의 순수함을 조롱합니다. 마니교의 허풍에 빠진 어거스틴을 구하려 했던 모니카에게 감독은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거짓으로 가득 찬 잔에 진리를 아무리 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니교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 그는 다시 점성술에 빠져듭니다. 거짓에 빠지면 또 다른 거짓이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거짓에게 수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의 영혼을 뒤흔든 사건이 발생합니다. 고향에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어릴 적 친구를 만납니다.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던 친구였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둘은 급속도로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없으면 살 수 없을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거스틴의 친구를 갑자기 불러 가십니다. 어거스틴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당신은 복수를 하나님으로서 당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의 뒤꿈치를 쫓으시고, 동시에 당신은 자비의 샘으로서 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당신께 돌아가게 하십니다.”


친구의 죽음은 삶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고향은 감옥이 되었고, 그와 함께 나누었던 모든 추억이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 스스로가 알 수 없는 하나의 큰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습니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한계와 비참한 실존을 인식하기에 이릅니다. 그 어느 곳도 쉼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도 안식할 자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변하는 그 어떤 것도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해진 그는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플라톤의 철학이 이미 성경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어거스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철학에 없는 것이 성경에 있었습니다. 플라톤주의자들의 책에는 경건의 표현, 고백의 눈물, 당신의 희생, 괴로워하는 마음, 상하고 참회하는 심정, 겸손, 당신의 백성의 구원, 당신의 신부인 도성, 성령의 보증, 우리의 구속의 잔이 없었습니다.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도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에 일격을 가한 것은 어린아이들의 들고 읽어라는 노래 가사였습니다. 그는 결국 성경을 펼쳐 읽었고, 그곳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말씀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구절을 읽고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았고 또한 더 읽을 필요도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의심이 구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AD 386년의 늦은 여름이었고, 어거스틴이 32세였습니다. 회심 이후 어거스틴은 이전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다음 해인 387년 밀라노에서 당시 기독교의 거장이었던 암부로시우스 감독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또한 수많은 저작들을 발표하며, 교회를 수호하기 위한 진리의 파수꾼으로 살아갑니다. 391년 그의 나이 37세에 사제 안수를 받게 되고, 4년 후엔 히포의 감독으로 세움 받게 됩니다.


어거스틴을 연구한 학자들은 <고백록>을 단순한 자서전으로 보지 않습니다. <고백록>에는 어거스틴 자신의 참회가 고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백을 통해 어거스틴은 다른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함이 얼마나 마땅 한가입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을 통해 교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10권부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다분히 교리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 부분에 많은 분량을 사용할까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살아온 여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 거짓 종교의 모순, 철학의 부족함,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편안, 즉 행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행복을 찾아 떠난 사람들의 보편적 삶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여행자입니다. 공부, 성공, 명예, 여행, 결혼, 직업 등등 모든 삶의 편린(片鱗)들을 파고 들어가 보면 그곳에 유리한 하나의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행복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마지막 부분에서 당신(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안식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행복 자체이고, 행복의 발원지입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웰빙은 미래의 꿈에도 있지 않고, 현재라는 쾌락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고 <고백록>의 문을 닫습니다.

당신 안에서 그것을 찾게 하소서.

그것을 위해 당신의 문을 두드리게 하소서.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그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그것을 찾을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 문은 우리에게 열릴 것입니다. 아멘

 

진정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 안에 행복이 있으니까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개정완역판)
국내도서
저자 : 성어거스틴
출판 : 대한기독교서회 200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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