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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Note/설 교

주기도문 강해(3) 용서-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by 하늘땅소망 2013.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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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용서-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인류(人類)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고르겠습니까? 예전에 영국문학협회가 세계 102개국 비영어권 국가 4만 명을 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영어단어를 온라인 설문 조사를 시행했다고 한다. 순위는 1위 어머니 mother, 2위 열정 passion 3위 미소 smile 4위 사랑 love 5위 영원 eternity 였습니다. 여기에 이의(異議)를 제기할 분이 있습니까? 아마도 ‘엄마’ 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단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엄마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 실례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판매량을 보아도 알 것 같습니다. 작년 2012년 4월 판매량이 이미 20만부가 넘었고 신경숙 작가 그 한 권으로 받은 인세가 무력 24억 원이 넘습니다. 벌써 1년 8개월이 지났으니 아마도 300만부는 팔리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언어권이라해도 엄마라는 단어만큼 많이 사용되고 사랑 받는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신경숙 작가 인터뷰에서 ‘엄마를 부탁해’를 쓰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뭔가 잘 풀리지 않고 답답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를 ‘엄마’로 바꾸자 소설은 한결 쉽게 써지고 풀어졌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엄마는 동일한 사람을 일컫는 칭호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시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지 ‘엄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간혹 있기는 합니다만 보편적 단어는 아닙니다. 반대로 친정어머니를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르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엄마는 바로 이런 겁니다. 허물없이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고, 가끔씩 싸울 수도 있는 관계입니다.

 

좋습니다. 엄마라는 단어를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무엇일까요? 무엇이 엄마라는 단어를 고귀하게 하는 것일까요?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경험에서 나오는 의미가 다를 것입니다. 저는 엄마라는 단어에서 ‘용서’라는 단어를 끄집어내기를 좋아합니다. 비록 제가 부족하고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엄마는 항상 저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버릇없어진다 말하지만 엄마는 그런 줄 알면서도 저의 죄를 간과(看過)해 주었습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매우 엄하신 분이고 자녀들과 말을 섞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야단을 치지는 않았지만 늘 잘못을 지적하고 매를 때리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형제끼리 싸워 크게 다툰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이 육남매를 모두 모아 놓고 매질을 했습니다. 잘못하면 당장 때리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아서 때렸습니다. 때릴 때는 항상 누나로부터 시작해서 큰형, 작은 형, 그리고 저까지 때렸습니다. 아래 두 명의 동생들은 거의 맞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큰 누나로부터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사십대 후반이셨던 아버님이 매는 참으로 아팠습니다. 누나가 매를 맞으며 울었습니다. 큰 형도 울고, 작은 형도 아파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곁에 계시던 어머님이 아이들을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을 향해서 ‘그만 때리란 말이요.’하며 사정을 하셨습니다. 엄하신 아버님은 엄마의 말을 들으실 리 없으셨습니다. 결국 저까지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엄마는 아파하는 우리를 안고 우셨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알고도 기꺼이 용서하시는 엄마의 마음을 부모가 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지도 알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엄마의 마음을 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가 엄마 같은 애정과 사랑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이해해주고 사랑으로 덮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엄마라는 단어가 가장 사랑 받는 이유는 이런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서로 용서에 대한 청원으로 개인적인 청원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주기도문은 모두 여섯 개의 청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의 세 개의 청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입니다. 1.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기를 바라는 청원, 2.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청원, 3.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청원

그 다음 사람들의 개인적인 세 개의 청원이 이어집니다. 1. 양식을 구하는 청원, 2.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 3.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구하는 청원. 그리고 마지막 송영(送迎)으로 마무리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청원(請願)인 용서에 대한 청원입니다.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문을 주해하면서 특이한 몇 가지를 주목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청원은 접속사가 붙어 있지 않은 하나로 연결된 청원인 반면, 우리에 관한 청원은 헬라여 접속사인 ‘카이’로 연결 되어 있어 세 개의 각기 다른 청원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련된 청원은 6:33의 앞 문단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한 가지의 청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모든 것’의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청원입니다. 순서상으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의 청원은 이미 다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전체의 요약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구하는 두 번째 청원, 즉 용서와 죄 사함에 대한 청원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겠습니다. 문장의 구조를 봅시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사함의 순서를 보십시오. 분명히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이유이자 근거는 ‘우리가 먼저 용서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용서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저 사람을 용서할 힘을 주십시오. 용서할 마음을 주십시오.’

만약 용서할 힘이 생기지 않거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럴 마음을 주지 않았으니 용서하지 않는 죄를 하나님 탓을 돌리며 안위(安慰)해 버립니다. 우리의 완악함을 하나님의 책임(責任)으로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꼬집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충고합니다.

‘하나님 나도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했으니 하나님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오늘 이 구절만을 보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뿐더러 상식적으로도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죄사함의 문제가 우리의 소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좀더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용서에 대한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을 꼭 참조해야 합니다. 그곳에 보면 제자들이 용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18:21)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루에 490번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죄를 짓는 사람도 없습니다. 2분에 한 번씩 용서해 준다해도 15시간 이상을 계속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뜻으로 우리에게 용서하고 하지 않으십니다.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용서를 더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하여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드려 줍니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임금에게 탕감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다 길에서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멱살을 잡고 갚으라고 말합니다. 갚을 수 없다고 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자를 다시 잡아오게 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18:33)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는 단어입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단어는 심장이 끊어지듯 아파하다는 뜻입니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18:27절에도 보면 왕은 종을 ‘불쌍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종은 자신의 친구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정말 중요한 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는 타인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200년 동안 일해도 값을 수 없는 돈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과 백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18:35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주기도문의 문구가 정확하게 반복되어 있습니다.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단 할지라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무효가 됩니다. 왜냐하면 용서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나’로 넘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자유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당연히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특권이 아닙니다. 용서할 특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여기서 실천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미루거나 양도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극명한 실천적 행위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으며, 용서하지 않고 사랑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미완료 형으로 남아 있으며, 용서를 통해 현재진행형이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를 ‘제자도’의 요청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용서에 대한 청원은 핵심입니다. 주님을 닮고자하는 이들은 주기도문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용서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이웃이 나에게 지운 짐을 내가 떠안는 행위입니다. 왕이 종의 일만 달란트 탕감해 줌으로 그 짐을 자신이 안은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짐을 져야 합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책에서 탕자의 비유를 들어 용서를 설명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즉각적으로 용서해 주고받아 줍니다. 그러나 그 용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책을 있는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잘못을 깨닫고 집에 돌아오기를 갈망하면서 마음에 큰 고통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날마다 아들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멀리 지평선 위로 후줄근한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아들을 최대한 따뜻하게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직접 모든 수치를 감당하고 아들을 더 이상 죄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했다. 간단히 말해 아버지는 아들의 수치를 친히 담당했다. 그는 명예를 가장 중시하던 사회에서 위신과 체면에 연연하지 않고 아버지로서의 권리와 명예를 모두 내버렸다.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사심 없는 사랑을 한껏 드러냈으며, 돌아온 탕자가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고 양팔을 벌려 그를 꼭 껴안았다.”

 

용서의 근저에는 아버지가 탕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은 마음의 가난함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가를 직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 원수를 용서할 수 있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받아야할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아시기에 스스로 그 진노를 십자가에서 홀로 떠안았습니다. 불쌍히 여길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 저희 엄마의 외침이 들립니다. ‘그만 때리세요. 그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을 얼마나 용서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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