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Quest for the Living God / 엘리자베스 A. 존슨
하나님이 가출했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Quest for the Living God
엘리자베스 A. 존슨 / 박총.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영혼의 이끌림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첫 장을 펴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극단의 상황으로 끌고 갔다. 저자는 대중을 위한 평범함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문장이나 주제가 난해한 때문이 아니다. 보수교단에서 순수하게 자라난 성도요 목사로서 용납하기 힘든 신학적 문제를 거부할 수 없는 근거와 논리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무장해제된 포로가 되어 현대교회가 망각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꼬박 2주가 걸려 완독했다. 살인적인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고 생각 정리한 틈이 필요했다. 거대한 쓰나미처럼 많은 상처와 생각의 변화들이 일어났다. 한 마디로 이 책을 읽는 것은 ‘위험한 기억’(110쪽)을 떠올리는 ‘위험한 작업’이다.
하나님 가출하다.
‘그런 낙원’은 없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인간이 만든 가상의 은익처로서의 낙원은 없다. 그런 낙원은 어딘가? 개념화되고 상징화되고 허영화된 기하학(幾何學) 낙원이다. 4세기 이후 기독교는 집요할 정도로 교리에 집착한다. 그 이후 대부분의 교리와 신학적 담론은 당시에 만들어진 논의를 주해하거나 풀어 해석한 것이다. 이단을 구분하고 교회의 순결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교리의 확정은 모호한 신이해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불분명한 신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 범주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해로운 것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분명하게 그을 수 있는 캐논(canon)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것은 로마의 기독교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는 점이다. 기독교과 국교화 되면서 캐논(canon)은 캐논(cannon)이 되어, 주도권을 점유하고 탄압하는 자리에 이른다. 기묘한 운명이다. 4세기를 기점으로 땅의 복음은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번역자가 붙인 제목 ‘낙원’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 졌다. 물리적 힘으로 억압하고, 무력으로 통치하고, 착취하고, 정죄하고, 소외시키는 종교가 되어버린 그들의 ‘그런 낙원’이 만들어 진다. 땅에 살면서도 땅을 잃어버리고 하늘의 복음만을 지향하게 된다. 광적인 하늘의 복음은 땅을 부정하고 멸망당할 ‘장망성’ 쯤으로 왜곡 시킨다. 이 땅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인간이 우상화 시킨 그런 하늘이 싫어 가출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땅으로 가출하셨다
중세의 타락과 몰락은 성속의 구분 때문이다. 일상에서 신비를 걷어내 하늘로 올려 버렸다. 거룩한 사람이 거룩하지 않는 사람을 차별했고, 거룩한 장소로 거룩하지 않는 장소를 소외 시켰고, 거룩한 일로 거룩하지 않는 일을 정죄했다. 땅을 회복하려던 성육신과 십자가의 외침을 외면했다. 성속의 경계를 허물었던 종교개혁은 모든 것을 거룩하게 했음에도 철저하게 하늘의 복음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통치한다. 신비도 없고, 여백도 보이지 않는다. 바빙크의 주장처럼 ‘단 한 평도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이 없’게 되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위로부터의 통치가 지배한다. 저자가 집요하게 땅에 천착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땅에서 삶의 여백을 만들고, 신비를 찾고 싶은 것이다. 논리적으로 규명하려던 신정론의 폐기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삶의 신비를 되찾는 것이다.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저자는 집요하게 땅에 천착(穿鑿)한다. 애착을 넘어선 집착이다. 근대적 종교허상을 걷어내고 진정한 복음으로 돌아가려면 땅으로의 귀한이 불가피하다. 창조의 완성은 땅이고 현실이고 삶이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땅에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은 연민하며 긍휼히 여긴다. 예수는 신분과 성의 차별, 민족과 나라의 구분을 넘어 치유하시고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오해와 편견의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와 시돈 지방으로 여행하셨다. 그분이 지금 여기에 오신다면 백인 전용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는 독일군에게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통당하는 이들의 편에서 항거할 것이며, 불합리와 불평등에 대항-Protest-할 것이다. 공생애동안 예수는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생애와 목숨을 땅의 회복을 위해서 바쳤다. 십자가의 죽음은 땅을 너무 사랑했던 하늘 복음의 자기희생이다.
만약 저자가 이 정도에서 멈추었다면 긴장은 어느 정도 완화 되었을 것이다. 낭떠러지가 시작되는 땅의 끝자락으로 몰고 간다. 신정론의 폐기를 넘어 이젠 삶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으로 나아간다. 여성으로서의 하나님, 검은 얼굴의 예수, 모든 종교 안에 깃든 범신론적 차원까지 끌고 간다. 땅에 집착한 흔적이 뚜렷하다. 보수교단의 목사로서 용납하기 힘든 부분이다. 번역자인 박총도 이 부분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관용구가 개인의 영적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생태, 인종, 여성, 삼위일체, 종교간 대화 등에서 경험될 수 있음을 가슴 떨리게 발견할 것’이라고 조언한다.(337쪽) 그래서 긴장했다. ‘그런 하나님’은 체제 속에 강요되어 우상이 되어 사라졌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단 말인가?
하나님은 십자가에 머무신다
원 제목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탐구’이다. 탐구를 모험으로 바꾸어도 되겠다. 이 책을 읽는 자체가 위험한 담론으로의 ‘모험’(17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간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간구의 대상이 ‘인식 불가능 하고 불가해하며,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 없으며 어떤 표현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28쪽) 또한 ‘어떤 말로도 하나님을 설명 될 수 없다’(36쪽)는 것이다. 땅의 사건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물음을 멈출 수 없게 한다. 근대적 계몽주의에 물든 교리주의자들은 신정론(神正論)이란 이름으로 모범답안을 제시했지만 역부족이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선량한 사람들의 고통을 단지 ‘허용’이란 단어로 풀어내기에 무자비하다. 홀로코스트의 암울함은 ‘당시 죽음의 수용소를 운영한 이들은 대부분 세례교인들이었다’(83쪽)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누구와 함께 계실까.
십자가로의 귀환(歸還)은 필연(必然)이다.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으로 ‘그의 고통은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고통’(100쪽)이 된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고 성육신을 시작으로 비하(卑下)의 길을 걸었다. 십자가에서 무능하고 연약한 채 죽었으나 정치권력의 부당함을 고발했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롬5:8)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자가는 세상의 고통 가운데 깊이 스며들 뿐 아니라 고통이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반대의 통로를 열어 준다.’(102쪽) 십자가 없이 신학적 담론은 무의미하다.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구별도, 정죄도 없다. 온 인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다시 태어났으며, 하나가 되었고, 화목하게 되었다. 십자가는 부정이자 긍정이며, 심판이자 용서이며, 정죄이자 회복이다.
십자가 안에서만 생얼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요14:6) 근래의 한국교회는 철저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면서도 정교야합(政敎野合)을 허용하는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명분을 지키기 위하여 사랑도 포용도 배제하는 야박한 기독교에게 누가 박수를 보낼까. 하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고, 배고픈 이들에게 양식을 주었고, 배제된 이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무능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정치와 타협하지 않았다. 보수교단 목사로서 위험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은 낙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생각한 낙원에 없는 하나님을 찾아보라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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