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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 4:14-5:10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샤마임 201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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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4:14-5:10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1. 말씀 읽기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2. 묵상

 

 

1)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오늘 본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허물많고 연약한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4:14-16은 지금까지 소개한 예수님을 정리한 다음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습니다.

 

이 네 가지 특징은 복음의 핵심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자격은 결국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네 가지의 사실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시험을 받으신이란 구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즉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육신적 갈망을 느끼셨고, 고독과 배신, 슬픔과 아픔을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경험된 앎을 통해 성도들을 아십니다. 그레이크 R. 쾨스터는 연약함’(15)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a) 육체적 연약함 b) 사회적 연약함 c) 죄에 대한 취약함

 

연약함은 궁극적으로 죄를 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영생할 수 없는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동정(συμπαθέω)’하십니다. 동정이란 헬라어 쉼파테오(συμπαθέω)’ 함께 느끼다의 합성어 입니다. 가족 중 누군가 아파하면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발톱이 빠져 아픔을 느낀다면 온 몸이 동일하게 그 아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이 동정(συμπαθέω)’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συμπαθέ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실 때 함께 슬퍼하십니다.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러한 우리를 예수님은 돕기를 원하시고, 도움을 청할 때 기꺼이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위해 언제나 은혜의 보좌(θρόν τς χάριτος)’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은혜의 보좌가 어떤 곳입니까?

 

a) 기도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필요, 우리의 고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인 것입니다.

 

b) 하늘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늘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성소입니다. 성소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입니다. 대제사장들은 대속죄일에 성소의 가장 내밀한 곳인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c) 왕의 보좌입니다.

보좌는 왕이 앉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는 한 지역의 분봉왕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 갑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좌에 나아가는 이들의 특권이며 복입니다.

 

 

2) 연약에 휩싸인 땅의 대제사장

 

이 땅에 대자사장들은 사람입니다. 아담의 피를 물려받아 죄성으로 가득 차있으며 시한부적 삶을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신과 동일한 육정(肉情)을 가진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은 죄인들이 가지고 오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 또한 죄를 짓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대제사장은 죄인들에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동정입니다.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죄의 무게가 다름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죄는 모두 불법이며 사망을 가져옵니다. 집보다 큰 바위만 바다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보이지 않는 모래 알갱이도 하나님의 공의의 바다에 가라앉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아는 사람들은 타인의 눈에 들어간 티를 찾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염려합니다.

 

겸손과 용서는 타인을 구분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자는 타인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자만이 타인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수많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먼저 팔복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악함을 아는 자만이 타인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μακάριοι οἱ ἐλεήμονες, ὅτι ατοὶ ἐλεηθήσονται.

 

긍휼히 여기는 것’(ἐλεήμονες)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ἐλεηθήσονται.)라는 단어는 모두 긍휼’(ἐλεέω)이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용서와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구제하다는 의미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율법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사용된 자비가 바로 긍휼’(ἐλεέω)이란 단어입니다. 긍휼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이 땅의 대제사장이 드리는 제사 속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고 싶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레위 지파, 그중에서 아론의 후손들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땅의 대제사장의 영광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럼 유대지파인 예수님은 어떻게 대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멜기세덱에게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전쟁이 일어나 소돔이 그돌라오멜에게 롯이 잡혀갑니다. 아브라함은 조카를 롯을 구해옵니다. 이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축복하고 아브라함의 십의일조를 드립니다. 간단하게 보이는 이 문제가 왜 예수님의 대제사장 자격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문제는 바로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기 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혈통을 따라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었습니다.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나중에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할 것입니다.(7) 여기서는 간략하게 넘어갑니다. 저희도 그 때 다시 살펴봅시다. 오늘은 멜기세덱이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제사장이라는 것만 기억해 둡시다. 그런 의미에서 아론을 선택하신 것과 다르지 않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제사장이 된 것은 자의가 하나님의 선택이며 은혜입니다. 물론 아론의 후손들도 근원적으로 은혜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비록 유대인이 아니고 아론의 후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와 이유는 바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격이 결코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덧입게 되는 예수님의 공로를 설명합니다.

 

첫째, 육체에 계실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둘째, 그 기도는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셨기에 죽음의 공포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구하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자신과 또한 자신에게 속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셋째, 순종을 통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9)이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얻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과 같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의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십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기도를 기꺼이 들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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