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8. 4:1-9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8. 4:1-9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 말씀 읽기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2. 묵상
3장과 4장의 주요한 주제는 ‘안식’입니다. 3:12에서 심도있게 안식을 다루면서 4장에서는 여호수아를 언급하며 아직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주었던 안식은 참된 안식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을 정복하여 안식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주는 안식은 불안전하고 진정한 의미의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고, 불안정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참된 안식을 주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수가 주는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안식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미’ 약속을 받았지만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한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 믿음과 복음을 결부(結付)시키라
첫 번째 당부는 그들이 복음과 믿음을 결부 시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광야에서 모두 엎드러집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도들은 복음을 듣고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같은 인생을 갈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약속은 받았지만 안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1절) 복음을 들었으나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했습니다. 즉 복음과 믿음이 전혀 다른 것으로 겉돌았던 것입니다. 믿음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것을 말합니다. 결부 시킨다는 말을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결부하다(숭케케라스메노우스 συγκεκερασμένους)는 ‘συγκεράννυμι’에서 온 말입니다. ‘섞다’. ‘연결하다’. 는 뜻이고 영어는 ‘to mix together’, ‘hence to agree with’로 해석합니다. 성경에 딱 두 번 사용됩니다. 한 번은 고전 12:24에서 '고르게 하다'로 사용되고 다른 한 곳은 이곳입니다. 고린도 전서 말씀을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고전 12:22-27까지 봅시다.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 단어는 ‘with, together with’라는 뜻을 가진 ‘σύν’와 ‘to mix’라는 뜻을 가진 ‘κεράννυμι’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서로 비판하고 잘난체 하는 것을 ‘섞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섞인다’는 말은 차별과 구분이 사라지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가진 의미를 더 확장시켜 봅시다. 차별과 구분은 대립과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눔과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분쟁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입니다. 이것은 그릇된 우월감에서 나옵니다. 섞는다는 것은 균등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한 컵에 물이 가득차 있지만 다른 컵는 조금 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두 컵을 섞으면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된 컵은 ‘더’도 없고 ‘덜’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할까요?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다 아프고, 한 지체가 즐거우면 다 즐거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랑은 경쟁 구도가 아니라 협력 구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히브리서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은 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들은 것과 믿음을 결부(συγκεκερασμένους) 시키지 못한 탓입니다. 즉 두 개를 섞지 못했습니다. 들은 것은 지식적인 차원의 복음입니다. 믿음은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 삶으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야고보가 엄중히 경고했던 ‘헛된 믿음’ ‘죽음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식과 삶이 연결되지 못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17,22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믿음은 진행형입니다. 언제나 동일함 순종의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약속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그럼 어떻게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미 믿는 우리들’(3절)입니다. 상당히 모호하게 들리는 표현이지만 풀어내면 이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삶이 아니라 ‘이미’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믿었고,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편지를 읽고 있는 이들은 예수를 믿고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만 고난이 깊어지고, 복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지금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 당신들의 믿음은 바른 것이고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들어갈 안식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창조가 마치고 칠일째 되는 날입니다. 칠일째 되는 날 하나님은 쉬셨습니다. 쉰다는 표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십니다. 요한복음 5:1-18을 보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하나님 아버지는 안식일에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일하시고, 항상 구원하십니다. 그럼에도 ‘쉬었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로부터의 쉼, 사망과 두려움으로서의 안식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러한 안식을 줄리는 만무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놀랍게 광야의 이스라엘을 향하여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6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은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닐까요? 헬라어 성경을 분명히 ‘복음을 받다’(εὐαγγελισθέντες)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음(εὐαγγελίζω)이란 단어는 복음서에도 나타난 그 복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복음(εὐαγγελίζω)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복음을 믿음과 결부(συγκεκερασμένους)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순종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6절) 그러나 순종 이전에 다른 무엇이 존재합니다. 출애굽이 일어난 ‘오랜 후’에 기록한 다윗의 글을 인용합니다.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 말씀은 시편 95:7-11입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다윗은 ‘완고한 마음’을 언급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반복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완고한 마음’입니다. 돌처럼 딱딱한 마음이란 뜻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과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물리적 장소 이동이 아닙니다. 영혼 깊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상태인 것입니다.
3)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3절의 ‘이미 믿는’과 10절의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이 미묘한 긴장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전한 안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곳에서 사용된 안식은 히브리서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6절) 우리는 아직 광야에 있습니다. 이후에 그려진 믿음의 사람들의 삶처럼(11장)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의무가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도 자신의 일을 쉴 것입니다.
나가면서
오늘 말씀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 삼아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들은 것과 믿음을 결부 시키지 못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자신의 삶을 돌이키지 못한 것을 경고합니다. 우리는 아직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구약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서] 10. 4:14-5:10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0) | 2018.05.15 |
---|---|
[히브리서] 9. 4:10-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0) | 2018.05.14 |
[히브리서] 7. 3:7-19 피차 권면하라 (0) | 2018.05.09 |
[히브리서] 6. 3:1-6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 2018.05.09 |
[히브리서] 5. 2:10-18 우리의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0) | 2018.05.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