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 1:19-26 비장한 각오
3. 1:19-26 비장한 각오
1. 말씀 읽기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 묵상
삶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하고 꿈꾸며 준비했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라 생각하며 달려왔는데 도착하고 나니 오히려 미궁에 빠진듯한 궁지에 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신다는 것이며,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소유와 명예, 건강과 삶까지 바쳤습니다. 그런데 정식적으로 복음은 11년 동안 전하지 못합니다. 46년 즈음에 시작된 1차 전도여행은 3차 전도여행이 끝난 67년 예루살렘에서 붙들림으로 감옥 생활이 시작됩니다. 감옥에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했지만 만나는 사람도 소수고, 자유롭게 설교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바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역은 문서 사역이었습니다. 당대에 그것은 신통치 않았고,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바울의 서신들을 섭리를 통해 보존하셨고, 신약성경에 넣어 기독교가 왕성하게 일어서도록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무능할 때, 하나님은 가장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주제처럼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1) 내가 살든지 죽든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의 하나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복수하고 싶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에 그는 주저했던 것입니다. ‘햄릿 증후군’이란 말까지 나올 만큼 유명해진 이 말은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반드시 모험을 감해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바울의 결단을 만납니다. 아마 그의 손은 주먹을 쥐고 있으며 잔뜩 힘이 들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장한 각오는 슬픔이 아닌 희열을 선물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의 비장한 각오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전제는 19절입니다.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바울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원(σωτηρία)’은 죄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감옥에서의 구원’ 즉 석방(釋放)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제럴드 호돈) 바울뿐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바울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전제에 근거하여 자신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20절) 될 것을 확신합니다. 바울의 석방은 바울의 무죄를 입증할 뿐 아니라 복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할 수 있다는 기대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온전히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매인 상태를 부정하거나 긍정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 전하기를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목적은 단 하나, 그것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존귀하게’(μεγαλυνθήσεται)라는 단어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행위(마 23:5)나, 하나님을 높이거나 찬양하는 행위(눅 1:45, 행 5:13)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만 드러나고 높여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존재의 이유와 목적, 방식과 태도를 결정하는 근거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햄릿과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하는 바울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2) 차라리
22절은 해석하기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넬슨 알렌(Nestle 1904) 판을 가져와 보면 역시 한글로 해석하기 쉽지 않습니다.
“εἰ δὲ τὸ ζῆν ἐν σαρκί, τοῦτό μοι καρπὸς ἔργου, καὶ τί αἱρήσομαι οὐ γνωρίζω.”
[개역개정 :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좀 더 나은 번역을 제시하면,
‘그러나 만일 육체 안에서 사는 것, 이것이 내게 일의 열매라면, 나는 어떤 것을 택할지 모르겠다.’(제럴드 호돈)
또는 공동번역의 번역을 보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공동번역)
명징하지 않는 문장은 바울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 ‘그 둘 사이에’(23절) 끼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 살면서 더욱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 천국에 가서 주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차리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갈망과 소명 사이에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가고 싶지만, 이 땅에 남아 소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싶지만, 남아 있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고 싶은 갈망 가운데 하나는 ‘육신’의 문제에 담겨 있습니다. ‘육신으로(ἐν σαρκί)’는 ‘육신 안에’이며, 육신은 사악하고 죄의 성향이 강한 ‘σαρκί’(기본형 σάρξ)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동물적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육신 안에서 거룩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바울의 갈등은 소명 때문만은 아니며, 죄의 성향과 싸워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룩에 대한 갈망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성도들은 한결같이 죄를 지을 수 없는 새나 가축을 부러워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권이지만 선택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남겨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바울이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 육신으로 사는 것을 ‘내 일의 열매’라고 바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열매는 다름 아닌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25절)입니다. 성도를 위한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입니다. 바울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떠나면서 베드로에게 ‘내(예수) 양을 치라’ ‘먹이라’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참 요 21장) 사람이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먹이고 입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육과 훈육이 필요하고, 영적 교육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사도들과 선생들을 통해 말씀을 배워야 자라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한 선생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성숙이 바울이 수고한 열매이며, 자랑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 가서 성도들을 만날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1:8)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παρουσίας)’(26절)는 종말론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있다’(파루시아 παρουσία)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 ‘강림’(살전 3:13, 살후 2:1)으로 번역되어 그리스도의 오심과 임재를 상징하는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어의 의미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가르침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와 종말에 흠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바울의 ‘비장한 각오’는 소명에 대한 헌신 때문이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하려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명을 이루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원한 천국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헛됨을 알고, 죄악된 육신을 통해 악한 영향력 아래서 영혼의 통증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사모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묵상이 출간되었습니다. 분량상 2권으로 분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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