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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 / 옥성호 / 테리토스

샤마임 2018. 2. 3.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

옥성호 / 테리토스


미친 듯이 성경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당시에는 내 역량으로 그것을 파헤칠 능력이 없었다. 성경은 의외로 복잡하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이십 대 후반에 고신대에 들어갔다. 책이 너무나 읽고 싶어서 학교 성적을 포기했다. 미친 듯이 읽고 또 읽었다. 고신대 도서관의 책 중 신학과 교육학에 관련된 책은 책의 순서까지 기억할 정도다. 졸업 후 몇 년 뒤에 갔을 때 순서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책이 늘어나면서 로비까지 도서관이 확장되면서 책을 전체적으로 옮긴 것이다. 그때는 그냥 읽기만 했다. 성경을 너무 몰라서. 신학의 신자도 몰랐기 때문에 읽기만 했다. 아직도 미친 듯이 책을 읽는다. 벌써 22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예전 알고 있다면 믿었던 것, 이것이 확실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졌다. 교회를 개척한 뒤, 매일 성경을 묵상한다. 마태복음을 묵상하고, 야고보서를 묵상하고, 에베소서도 4장까지 넘어왔다. 원어 성경을 읽고, 주석을 보고, 설교 집과 해설집도 살펴본다. 수십 번 성경을 통독했지만 통독하는 것과 매일 한 장 한 장 곱씹어 가며 읽는 성경의 맛은 안전히 다르다. 다름을 넘어 그동안 보지 못하고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난제들이 성경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깜짝깜짝 놀랜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확실한가? 의문을 제기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또 질문한다. 삶과 격리된 성경, 정석처럼 믿어왔던 존 파이퍼와 웨인 그루뎀, 미친 듯이 사랑하여 책을 씹어 먹을 정도였던 로이드 존스의 설교들... 읽고 또 읽으며 느끼는 것은 그들의 주장은 많은 것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통이고,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전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신학적 지식이 오류 일수도 희미한 두려움을 느낀다. 어쨌든 난 이 책을 세 시간 만에 다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역시 옥성호다그럼 기존 교회가 생각하는 구원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책을 읽고 드는 생각들을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은 책의 말하려는 의도만을 말하지 않는다. 책과 더불어 떠오른 생각까지 포함한다.


먼저, 숨겨진 야고보는 숨겨지지 않았다. 다만 신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신학계는 신학에 관심이 있지, 야고보라는 중요하지 않은 인물에는 관심이 적다. 그러나 이제 중요하게 다루어할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 신학은 '바울신학'에 함몰되어 있다는 말이 맞다. 한국뿐 아니라 정통 기독교로 인정받는 개혁주의 노선이나 복음주의 신학은 이신칭의나 교리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 들어 복음의 공공성을 강조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면 관심조차 없었던 주제다. 이것은 야고보보다는 바울에게 과하게 치우쳐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야고보를 기독교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비밀처럼 말하지만 비밀은 아니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항이다.


둘째, 저자는 집요하게 성경을 파고 들어가지만, 역시 신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추론과 논리들이 얽히고설킨다. 나라면 죽어도 쓰지 못할 책이다. 신학적 오류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을 할례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주장을 내 세우며 그것은 곧 하나니의 말씀, 토라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59)는 억측이다. 바울도 바리새인이며, 율법을 지킨 사람이다. 또한 율법과 토라는 같지 않다. 이것도 너무 쉽게 단정 지어 버린다. 유의하여할 부분이다.


셋째, 아직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물론 후반부에서 저자의 생각들을 옮겨 놓았지만, 그것으로 뭔가 부족해 보인다.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라면 저자는 예수는 대속의 죽음도 당하지 않았고, 단지 정치적인 죽음으로 단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전체의 핵심 교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도발적인 주장이다. 왜 그러는지는 책을 통해 읽기를 바란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 사이의 기나긴 긴장은 신약신학에서 중대한 논제다. 저자가 이 부분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정통 신학자들의 주장이 결여되어 있다. 필자의 기억에 톰 라이트의 글은 한 번도 인용된 적이 없는 것 같다. 공정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넷째, 그럼에도 이 책은 위대하다. 중요한 문제를 짚어 준다. 공관 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비교한다. 아직 필자도 생각한적 없지만 요한복음의 성만찬 날짜가 공관복음서와 다른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저자는 마가복음 우선설을 전제한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확고한 것은 아니다. 단지 여러 가지 정황 속에서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마가복음이 마태복음의 요약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것으로 안다. 또한 이러한 저자의 논지 속에는 저자가 적지 않게 신학적 지식을 습득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자가 좀 더 유대적 문헌과 전통, 또한 자료를 충분히 활용해 성경이 가지는 난제들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이 주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까지 바란다는 것은 필자의 욕심일 수 있다. 저자도 자신의 확고한 논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동안 얼마나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어왔는지 부끄러웠다.


다섯째, 에비오나이트(Ebionites)를 예수님의 제자의 무리로 확정 짓는 것은 신선했지만 중요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즉 저자는 에비오나이트 그룹을 바울로부터 배척당한 유대인 기독교 그룹으로 한정 짓는다. 이것은 지금의 정통교회는 바울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기독교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 속에 담긴 유대인들에 대한 해석과 긴장 등은 충분히 인정한다. 에비오나이트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구약 율법의 속성들을 다시 재해석하고 정립해야 한다. 즉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도덕적인 율법인지, 제의적인 것까지를 포함하는지 등의 복잡한 문제가 남겨져있다. 이 문제는 다시 포로기 시대의 유배된 유대인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포로기의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안식일도, 음식 등도 율법을 어겨야만 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여섯째, 저자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구원은 삶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자는 대속의 신학을 인정하지 않은 듯하다. 기독교 초기 문헌 속에는 교리는 거의 없고, 높은 도덕적 삶을 요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은 사실 혁명적이다. 기독교는 대속의 신학을 견지한다. 예수를 단지 선지자로만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바울이 만든 신학에 함몰되어있다면,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 된다. 이 부분에서 현대 교회는 신학 자체가 삶과 너무나 격리된 체 단지 법정적 칭의만으로 구원을 쉽게 말하는 체제에 갇힌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본 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좋아하면서도 이단적 냄새를 맡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고인이 되신 스승이신 정훈택 교수님의 마태복음 논문인 <열매로 알리라>도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었고, 아직도 의심으로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이들이 많은가. 이것은 누군가의 주장처럼 개신교가 최첨단의 영지주의적 이단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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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한국의 목회자들이 공부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이다. 이제 이런 책은 적지 않게 나올 것이고, 관념적 구원론에 함몰되어 교리만 추종하는 현대교회는 경각심을 갖고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경고하는 책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는 더 이상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평범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위기이며 어쩌면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저자와 같은 평신도 학자들이 기존의 목회자를 대신할 수 있으며, 상식이 통하는 교회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아니, 벌써 시작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교회로 하여금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은 단지 교리적으로 비판하지 말고 사회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총평은 이렇다. 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보수교단의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서 납득이 안 된다. 특히 요한복음과 공관 복음을 대비시키는 부분에서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바울이 기존의 사도들을 배척하기 위해 야고보를 숨겼다는 논리도 따를 수 없다. 이 부분은 디모데와 디도의 할례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 저자의 생각의 궁금하다. 또한 왜 공동서신은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야고보와 베드로의 서신은 중요하게 다루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부분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쳤고, 잘 보여 주었다. 특히 십자가 아래의 예수님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와 마리아의 재혼의 문제는 성경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이제는 목사들이 성경과 믿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이 책은 한국교회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신호탄이다. 교회가 몰락할 것인지, 아니면 새롭게 시대를 재해석하고 응전하여 다시 일어설 것인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어떻게 이 시대를 논할 수 있을까? 약간은 신학적 모순과 비약이 느껴지지만 굉장히 도발적이다. 그리고 깊이깊이 고민해야 할 숙제를 남긴다. 그리고 앞으로 저자의 책들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목사님들께 추천하면 실례가 될까? 읽고 난다면 반응은 '미친 놈'이라고 하던지 '그래도 너무 심했다'고 하던지, '탁월하다' 셋 중의 하나가 될 것 같다. 난 심했다와 탁월했다가 뒤 섞여있다. 만약 이 책을 읽은 일반 교인이 목사들을 찾아가 질문한다면 과연 누가 답을 줄 수 있을까? 그러니 목회자들부터 빨리 책을 구입해 읽어야 한다. 이 책은 <다빈치 코드>가 아니다. 성경과 초대교회 역사에 탄탄하게 뿌리내린 신학 논쟁이다.



  
저자 : 옥성호  | 출판사 : 테리토스
판매가 : 12,000원10,800원 (10.0%, 1,200↓)
기독교는 한 마디로 비밀의 종교입니다.지난 이천 년간의 비밀이 '진리'라는 이름 아래 겹겹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비밀의 단 한 꺼풀도 벗기지 못한채 평생동안 신앙생활을 합니다.아니, 교회에서 배운 것 외에는 질문을 던진 적도 없습니다.왜 기독교가 비밀의 종교가 되었을까요?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로마라는 엄청난 권력과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로마는 사라졌지만 기독교(가톨릭)는 유럽 전체를 휘어잡은 절대 권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권력의 속성은 언제나 비밀입니다.엄청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 많은 비밀들이 만들어지고 또 은폐되어야만 했습니다.무려 이천 년간 말입니…[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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