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연구]아브라함(5) 롯을 구하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축복
[성경인물연구]아브라함(5) 롯을 구하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축복
창세기 14장
1) 전쟁이 일어나다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 소돔 성에 머물게 된다. 아마도 그 지역에서 소돔 성은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도시였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 동남부에 위치한다고 하지만 증명된 것은 없다. 지역적 특징을 통해 추측할 따름입니다. 만약 소돔이 현재 추측하는 사해 남부가 된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요단(요르단)으로 알려진 곳은 사해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사해 남부의 경우는 요단에서 거리가 100km가 훨씬 넘고 편하게 지날 수 있는 길도 없다. 또한 사해를 중심으로 길이 있기는 정서적으로 상당히 단절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추측하고 있는 사해 남부가 소돔과 고모라고 단정 짓는 너무 성급한 것이다. 만약 소돔이 사해 남부지역이라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롯이 왕의 대로를 따라 이동하여 사해 남부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것들에 대해서는 공부해야하고, 우리의 주장이 맞는지 검증할 필요는 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시날 왕(창 11장)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형성한 연합군이 가나안 지역을 쳐들어 온 것이다. 이들 모두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이다. 엘람은 페르시아만 북동쪽이다. 현재 예멘 지역으로 알져 있다. 시날은 바벨론 지역이고, 엘라살은 니느웨 북쪽에 위치한다. 고인은 하란 북쪽 지방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들은 가나안과 거리가 상당하다. 직선거리만으로도 900km 가까이 되는 거리다. 실제로 도로를 따라 움직이면 1400k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들이 자그마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 성읍을 식민지 삼고 공격해 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성경 속 지명이 현대 지명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이 부분은 고고학자들에게 맡기고 성경으로 들어가 보자.
(지도는 다음 사이트를 참고 MyHolyBok)
그돌라오멜 연합군은 소돔 연합군의 예상과 다르게 사해를 돌아 사해 남쪽에서 진격해 들어온다. 싯딤골짜기에 모여 있던 소돔 연합군은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만다. 결국 소돔에 거하던 롯도 포로로 잡혀 간다. 전반적인 상황으로 볼 때 이 전쟁은 후대에 일어날 전쟁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합군들은 최소한 5만 이상의 연합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소돔 도시들이 그돌라오멜에게 공납을 바치다 십삼 년 째 되는 해 거절한 것이다. 그러자 그돌라오멜 왕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쳐들어 왔다. 14:5-7까지를 볼 때 가나안 동남부 모든 지역이 배반한 것으로 보인다.
2) 추격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롯이 포로로 잡혀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구하려 간다.(13절) 이곳에 유의해야할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아모리 족속’의 마므레가 ‘아브람과 동맹’(13절)한 자로 소개된다. 그 동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고, 왜 동맹해야 했는가 의아하다. 이 부분은 난제이며, 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루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간다. 14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종들 같지만 아니다. 24절에서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로 소개한다. 즉 그들은 함께 간 것이다. 의문스러운 것은 아브라함의 종이 삼백십팔 명인지 동맹한 자들을 포함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고든 웬함은 ‘집에서 길리운 자’( )‘집에서 낳은 자’로 본다. ‘길리운’의 ‘옐리데이’의 원뜻은 ‘낳다’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318명은 아브라함의 직속 하인들이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세력이 컷는지도 나중에 다룰 것이다. 그는 일반 족장이 아니라 작은 국가의 왕 같은 존재였다. 동맹한 자들과 합한다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적어도 천 명이 넘을 수 있다. 그러나 송병현의 경우는 기드온 삼백용사를 떠올리며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잘못된 해석이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홀로 싸우지 않았고, 전쟁을 기다리던 다른 이스라엘과 합세해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왕들의 연합군에 비하면 세족의 피와 같다.
그들은 곧장 일어나 ‘단까지 쫓아’(14절) 간다. 우리는 또 다시 난제에 봉착한다. ‘단’이라는 지명은 어디일까? 만약 이곳이 사사기에 단 지파가 라이스를 정복하여 세운 갈릴리 북단의 단이라면 창세기는 출애굽 시대가 아닌 최소 왕정 시대가 될 것이다. 어쨌든 난해한 부분은 넘어가자. 밤에 가신들을 나누어 공격했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간다. 최소 수만에 이르는 연합군을 천 명 남짓한 종들과 싸워 전쟁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습을 통해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정체를 파악할 수 없어 더욱 놀라 도망갔을 수도 있다. 결국 전쟁은 승리했고, 롯과 가족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실제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확신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전쟁 참여는 롯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다. 이것은 다시 소돔의 멸망 직전에 다시 반복된다. 자신을 버리고 간 롯에 대한 아브라함의 복수라고 하면 과할까?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원수에 대한 ‘사랑의 복수’의 모범이 아닐까.
3) 멜기세덱의 축복
히브리서 기자의 의하면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모형론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다루자. 일단 창세기 안에서만 살펴보자.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이 찾아온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오기 전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영접한다. 자신의 것을 찾으려는 속셈이다. 조금 후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영접한다. 떡과 포도주는 가져와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성만찬으로 끌고 가는데 억지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것을 성만찬과 연결 시킨다. 떡과 포도주는 당시 전쟁 후나 잔치에서 쉽게 먹고 마시는 음식이다.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을 정리해 보자.
먼저, 그는 살렘 왕이다.
살렘은 현재의 예루살렘이며, ‘샬롬’과 동일한 뜻으로 평화란 뜻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란 뜻이다.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이란 책에서 스티븐 빈츠는 ‘예루’가 수메르어 ‘토대’ ‘거주’ ‘지역’을 뜻한다고 말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예루살렘을 '우루살리뭄'과 '루살리뭄'이란 지명으로 언급한다. ‘우르’는 모두 ‘토대’란 뜻이다. 예루살렘은 다윗 때에 가서야 겨우 정복이 되지만, 고대 이집트 역사에 등장할 만큼 오래된 도성이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족보가 없다고 말한다. 족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의 기원은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다. 멜기세덱의 정체는 기이하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오직 아브라함과 롯뿐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기회가 되면 이 부분을 따로 언급하겠지만 아브라함은 ‘선택’ 받은 것이지, 아브라함만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멜기세덱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도 제사장이다. 그러나 살렘 왕 보다는 높지 않은 것 같다. 제사장이란 의미 속에서 속죄의 제사가 이미 존재해 왔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 노아와 후대의 제사, 아브라함의 제사가 단순한 제의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이미 성막의 기능을 감당하는 제의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셋째,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고든 웬함은 멜기세덱을 유대인이 아닌 존재이며, 성경 속 이방인들이 복을 얻는다는 것과 연결시킨다. 유대인이란 명칭의 역사는 포로기 이후에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면 아론 계열의제사장도 아니라는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님의 초월성을 대입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의 구약적 정신을 회복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모든 이방인까지 미치는 복이며 육신적 혈통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이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한다. 천지의 주재, 지극이 높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기게 하셨다. ‘지극히 높으신’이 네 번 연속 사용됩니다.(18, 19, 20, 22)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들은 아브라함의 손에 붙였기 때문이다.(20절)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다.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비굴한 모습으로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고 물품은 가져가도 된다고 말한다. 사람이 없으면 물건이 필요 없다. 소돔 왕은 전쟁에서 지고서도 책임은커녕 다시 사람들을 자신의 종처럼 부리기 위해 사람들을 달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동맹한 자들의 것만을 제하고 모두 돌려준다.
[더 묵상한 주제]
1. 전쟁이 왜 일어날까요?
전쟁은 욕망 때문입니다. 세상은 전쟁터 입니다. 전쟁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욕망이 충돌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정복하고 지배하고 배신하고 전쟁을 합니다.
2. 아브라함은 롯을 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롯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연합군에 비해 현저히 약한 병력을 가지고 있지만 롯을 위해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을 통해 한 가족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전쟁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겸손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멜기세덱의 말을 통해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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