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동진에서 삶을 묻다

샤마임 2019. 8. 21.
반응형


정동진에서 삶을 묻다




"어디로 갈꺼야?"

"남애리"

"좋아 가자"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아직 태어난 곳에서 2km도 벗어나지 못했을 때 지도를 보고 동해안 여행을 꿈꾸었다. 많은 도시와 지역대표상품이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동해안을 따라 우산표시가 붙은 수많은 해수욕장만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 달맞이 고개를 기점으로 해운대 해수욕장은 남해에 속하고, 송정해수욕장부터는 동해이다. 


송정, 일광, 임랑, 나사, 진하, 주전몽돌, 정자, 관성솔밭, 봉길, 나정고운, 오류, 삼정, 포항송도, 영일정, 칠포, 오도리간이, 월포, 조사리간이, 화진, 장사, 남호, 하저, 오보, 경정, 대진, 고래불, 백석, 후포, 구산, 기성망양, 망양정, 봉평, 후정, 나곡, 고포, 월천, 용화, 원평해변, 부남, 맹방해면, 삼척해변, 추암, 어달해변, 대진해변, 망상, 기곡, 도직해변, 옥계해변, 금진해변, 정동진해변, 고성목, 등명해변, 안인해변, 염전해변, 남향진해변, 안목해변, 송정, 강문해변, 사근진해변, 순포, 사천해변, 사천진해변, 연곡해변, 영진해변, 주문진해변, 지경리, 원포, 남애1리해변, 갯마을해변, 멍비치, 광진해변, 죽도해변, 동산해변, 38해번, 하조대해변, 동호해변,  낙산해변, 설악해변, 정암해변, 속초, 캔싱턴해변, 봉포해변, 천진해변, 청간해변, 아야진해변, 교암해변, 백도해변, 자작도, 삼포, 송지호, 공현지, 반암해변, 화진포해변, 마차진해변, 그리고 명파해변


모두 셀 수도 없는 무지막지한 동해안 해수욕장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남애1리해변. 20년이 훌쩍 지난 옛적 어느 날, 아내는 아버지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아니 아버님이 이곳에 계셨다. 성수기가 지난 동해안. 뜨겁지 않지만 열기는 아직 남아 있다. 덕분에 여분의 열기와 비수기의 한가함은 고즈넉함을 선사하다. 


아내는 하염없이 바다를 본다. 서핑하는 사람들을 보며, 

"제들은 잘 타는 애들이야."

그런가 보다. 타는 것보다 '그냥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 그렇게 망망대해에 시선을 묻고 떠날 줄 모른다.



해가 저물기 전, 동해 막국수 집을 찾았다. 점심 후 5시까지 브레이크 타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골목에서 놀던 고양이와 눈을 마주친다. 족히 다섯 마리는 되어보이는 고양이 패밀리. 노랑이 두 마리, 검정 하나, 삼색 하나. 그리고 어미로 보이는 노랑이 또 하나.


고양이는 풍경이다. 아무리 별볼이 없는 풍경이라도 고양이 한 만리 앉아 있으면 '포토존'이 된다. 존재만으로 명작을 만드는 고양이의 존재감은 고대 이집트 고양이 신 바스테트만으로 충분하리라. 야생의 짐승을 부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야생성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야생성이 거의 사라진 동물은 소와 양, 염소 등이다. 좀 더 덜 제거된 개와 고양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



고양이는 길들여 지지 않는다. 다만 길들여졌다고 꼼수를 부리는 것일뿐. 사람은 고양이를 분양 받고, 산다 착각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을 기르는 집사를 간택할 뿐이다. 고양이는 동물이 아니라 신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지. 사람이 고양이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양이에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사랑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거야···”


 “그건 너무 잘 잊혀지고 있는 거지. 길들여진다는 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넌 아직은 나에게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 역시 마찬가지일거야.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아내는 고양이에게 길들여진 것이 분명하다. 기꺼이 고양이의 잔소리와 찡얼거림을 다 받아내니 말이다. 고양이에게 한 것의 절반만이라도 나에게 했다면 우리 부부는 세상 최고의 부부가 될 것이다. 



젊을 때는 배고파 먹고, 나이들면 추억으로 먹는가보다. 아내는 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버지와 함께 했던 막국수 집을 찾았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었던 허름한 막국수집. 기억은 온전치 못한가보다. 결국 그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동해막국수>을 찾았다.

 


달콤함과 씁쓸함이 기묘하게 뒤섞인 막국수는 예전 같지 않았다.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변했다'고. 막국수가 변한 것일까? 아내의 입맛이 변한 것일까? 아내는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보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달콤하다는 것을. 유난히 아버지를 좋아했던 아내는 아버지와 함께 모든 것이 '맛'있었다. 아니 그렇게 기억 되었으리라. 


그래도 나는 좋았다. 충분히 맛있었다.



주문진 항까지 내려갔다. 주문진 수산시장을 둘러보고, 이곳저곳 구경삼아 걸었다. 존재는 흔적은 남긴다. 많은 사람이 찾은 길은 닳아 빛이 난다. 하지만 인적의 드문 골목은 드문드문 잡초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낯선 곳이지만 삶의 방식은 한반도 어느 곳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두어 시간을 걸으니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거리에서 가까운 싸구리 모텔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씻고 영화 한 편을 청했다. 머리를 비울겸 이연결 주연의 <용문비갑>을 틀었다. 하늘을 날고, 손가락 하나로 튕겨 나간 돌조각 하나에 수십 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허풍스런 무협 영화였다. 영상미가 그런대로 있어 보기 시작했다. 보다 피곤하면 끄고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TV 앞에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자신은 중국무협 영화의 광팬이라나 어쩌나... 



날이 밝자 정동진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박이추 커피공장에 들렀다. 어젯밤, 아내는 강릉이 커피로 유명하다고 꼭 들르자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박이추 커피공장이다. 오래 전, 뉴스를 통해서 한 번 접한 나로서는 사뭇 궁금하기도하고, 아침을 때워야?하는 필요성에 의해 기꺼이 들렀다.


말복이 지난 동해안은 의외로 한가했다. 박이추 커피공장 역시 많이 않은 몇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여분의 여름을 즐기고 있다. 둘이서, 다섯이서, 연인끼리, 부부끼리, 온 가족이 함께 빵과 커피를 마신다.


우리는 이층으로 올라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태어난 처음, 휴가니까... 하며 거금을 들여 커피 두 잔과 토스트 세트를 주문했다. 커피값은 3000원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촌스러운 고집을 가진 나에게 그것의 세 배가 되는 커피. 수전증이 온 탓인지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어난다. 이 과분한 커피를 도대체 누가 마신단 말인가? 평생에 한 번 먹을까 말까하는 커피를 손에 잡으니 유난히 중력이 느껴진다.


아내는 맛있다며 바디감, 후미, 달콤, 씁쓸... 등 형이상학적 언어로 충만하다.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음 괜찮네'로 답했다. 분명 영혼 없는 대답이다. 일단 그걸로 만족하자. 다시 정동진으로 향했다.






서울 광화문을 중심으로 정동에 위치한 곳이다. 정서진은 인천이며, 정남진은 전남 장흥에 자리한다. 정동진은 일출로 유명한 곳이자, 고현정이 출연한 <모래시계>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장 인상에 남았던 곳을 '정동진'으로 꼽았다. 밥도 먹지 않았고, 볼거리도 없는 곳이다. 단지 정동진역에서 바라본 수평선뿐이었다.



아내는 바다를 좋아한다. 분주하고 인공적 구조물로 가득 찬 도심의 바다가 아닌, 자연과 친밀하고 가장 덜 개발되었으며, 한가한 바다를 좋아한다. 아내는 정동진을 찾았을 때 비수기인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관광객은 불과 몇 십 명에 불과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기차는 정동진에 온다. 저마다 사연을 싣고.  



바다, 수평선. 푸르름, 서해가 구수한 황토빛으로 가득 차 있다면 동해안은 냉철함 푸름이 지배한다.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망망대해는 제한된 공간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아내는 한 참을 바라본다.


"왜 그리 멍하게 있어?"
"그냥 보는 거야!"

그렇다. 아내는 그냥 보는 거다.


그냥 보는 바다. 누군가에게 바다는 낭만이고, 누군가에게 바다는 실존이고, 누군가에게 바다는 생존이다. 아직 스물이 되지 않을 때, 취업을 위해 부산남항에 정박된 배를 타고 보름 동안 알랙스카를 향해 머나먼 여행을 했다. 앞을 봐도 바다, 뒤를 봐도 바다. 온통 바다 뿐이다. 그 적막함은 불어오는 바람과 벗한다해도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다. 검푸른 바다는 덧없이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죽음처럼 잔인했다. 어린 나에게 바다는 공포와 멀지 않았다. 그 후, 바다는 낭만과 공포를 동시에 주었다. 바다는 그리움이면서 동시에 적의(敵意)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 우린 점점 내려갔다. 적도와 가까워질수록 바다의 색이 변했다. 검푸른 바다는 흐릿한 황토빛으로 물들어 갔다. 아직 동해인데 말이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한참 넘겼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이라 아직 허기를 버틸 것 같아 더 내려가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묵호였다. 묵호항은 동해시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이다. 지리적으로 동쪽에 울릉도를 두고있어 울릉도로 향하는 여객석이 있는 곳이다. 항만법 1종항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항구이다. 


동해에 오면 물회가 먹고 싶었다. 몇 곳에서 물회를 먹어보긴 했지만 동해안에서 맛보는 물회는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내는 묵회 물회를 검색해 지역주민이 많이 찾는다는 부흥 횟집을 선택했다. 회와 깨소금. 그리고 상추와 당근 등이 잘게 썰려 한 곳에 부어졌다. 매콤한 육수는 따로 가져왔다. 맛은 별미였다.


물회는 예술이다. 당근, 양파, 고추가루, 깨, 양배추, 파. 저마다 강하고 저돌적인 맛과 향을 지닌 재료들이다. 재료들이 요리사의 손을 거쳐 한 곳에 모아지자 재료는 예술이 되었다. 그동안 어느 곳에서도 맛보지 못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심오한 맛을 낸다.


우리의 삶도 이러지 않을까? 누구는 상추 같은 사람, 누구는 마늘 같은 사람, 누구는 깨소금 같은 사람. 성향도 성격도 키도 생각도 고향도 다르지만 함께 어울려 살아감으로 삶은 행복이되고, 살아감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온통 양파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까도까도 알 수 없는 사람들만 즐비한 세상...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다면 깨소금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향이 좋아 너도나도 좋아할 성 싶지만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한 주먹만 쥐어 입에 털어 놓으면 질리고 토하고 말 것이다. 


삶은 사랑과 미움, 밋밋함과 독특함, 쓴맛과 비린맛, 강열함과 지루함이 버무려지고 뒤섞여 가족이 되고, 사회가 되고, 삶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 물회에 고춧물과 양파만 잔뜩 들어 있다면 공짜로 준다해도 먹지 않을 것이다.



배가 든든해 졌다. 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한산하다. 여름이 가기 싫은 듯 아직 열기를 머금고 묵호항에 내려 앉아있다. 묵호에도 사람이 산다. 수산시장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내는 유난히 수산시장을 좋아한다. 짠내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음.. 바다 냄새"

아내는 바다 냄새를 안다. 아니 사랑한다. 약간의 비릿함, 약간의 향긋함이 짭쪼름한 바다바람과 함께 이곳에 묵호항이라고 속삭인다.


묵호항에 사람이 있다. 묵호항은 누군가에게 낭만의 여행지일지 모르나,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다. 2019년 8월 21일 묵호항, 저들은 삶의 터전이고, 나에게는 낭만의 여행지이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마주한다.




추억이 늘었다. 꿈꾸는 듯한 먼 동해안 여행은 추억으로 남았다.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심방 가면 나이든 분들을 힘들어 하면서 이번에는 어떻게 이야기를 그리 잘해?"

 

주문진에서, 묵호에서 아내는 육십 대가 넘은 분들과 줄곧 이야기했다. 나이 든 분들과 대화하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아내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여행지잖아"

 

그랬다. 책임을 져야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여행 중에서 만난 '그곳'의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님도 길 위에서 많은 대화를 하셨다. 특히 누가는 길 위의 주님을 주목하여 보았다. 갈릴리 해변을 걸으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대화하셨다. 길 위의 신학,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8시가 한참을 넘기고서야 집에 도착했다. 아직 여행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것이 인생이다.

반응형
그리드형

'일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포 헌책방 중고서점  (0) 2020.04.20
전쟁과 고양이  (0) 2019.09.09
현충일, 동성로를 걸으며  (0) 2019.06.06
오래된 추억, 김광석 거리를 거닐며  (0) 2019.05.14
그래도 꽃은 핀다.  (0) 2019.01.3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