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7. 4:10-13 일체의 비결을 배우라
[빌립보서] 17. 4:10-13 일체의 비결을 배우라
1. 말씀 읽기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2. 묵상
10-20절까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이야기와 이에 대한 바울의 감사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대목이기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좀 더 깊이 묵상해 봅시다. 14절에 의하면 빌립보교회가 바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도움을 칭찬하면서도 말을 아낍니다. 잘못 읽으면 도움이 그다지 필요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의 위험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면에서는 도움의 손길로 인해 자긍해서는 안 된다는 권면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울 때 교만하거나 자긍하게 됩니다. 그것은 도움이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 받은 선물임을 안다면 결코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선물을 받고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1) 도움의 손길
10절에는 바울의 기쁨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이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이 바울을 기쁘게 할까요? 제랄드 호돈은 ‘δὲ’를 강조하여, 바울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 그렇다. 나는 ... 을 잊을 수 없다’말로 의역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도왔던 것을 말하기 위해 지금까지 참고 또 참았던 것입니다. 이제 편지를 마칠 때가 되자 그 사실을 언급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바울에게 빌립보교회의 도움은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움을 준 사실을 잊어야 은혜가 되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절대 잊지 않아야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반대로 행합니다. 도움을 준 사람은 자신이 베푼 공로?를 무덤까지 가져가며 이야기하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너무 쉽게 누군가의 도움을 잊어버립니다.
바울은 이전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자신의 ‘기쁨’을 공개합니다. 도움 받은 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큰(메카로스 μεγάλως)’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쁨은 ‘주 안에(ἐν Κυρίῳ)’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다는 뜻은 모든 일의 과정이 주님께서 의도하시고 인도하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도움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허락하신 것으로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셨기에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성도는 모든 일에 감사해해야하며,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실 때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감사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 도움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만한 사람, 그런 마음을 지닌 이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물질을 소유했다하여 도움을 손길을 내밀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가진다해도 결코 나누지 못합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들이 행위의 열매로 드러난 것입니다. ‘생각하다(프로네인 φρονεῖν)은 단순히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았습니다. 바울을 통해 받은 복음과 영생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2) 자족하기를 배우다
바울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의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그들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11절)는 표현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시기적으로 그리 적절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함으로 바울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상황이 어떻든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하고, 배척과 배신, 모함과 모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도왔고, 사랑도 받았습니다. 때로는 풍족하고, 때로는 핍절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바울의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제 수많은 시간이 지난 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11절)다고 고백합니다.
‘자족하다’는 ‘아우타르케스(αὐτάρκης)’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족은 ‘더 이상 뭔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해석만으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족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의존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자족은 소유가 그리스도로인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오직 ‘주 안에서’ 기뻐하고,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중요한 교훈을 상황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비천에 처하기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가진 명성은 교회 안에서, 복음으로 인한 명성이지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비천의 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내려놓고 죄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비하하셨습니다. 신이면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완전한 지혜이시면서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고난과 배신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비참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 풍부에 처하기
어떤 이들은 비천한 때에 인내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지만 풍요의 시간에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바울은 비천할 때뿐 아니라 풍부에 처할 때 역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비천한 자들은 풍요로운 자들에게도 동일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비천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통제가 아니라 풍요 속에서도 진리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풍부에 처할 때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자유로워야하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가장 완벽하고 강했던 아담과 하와도 뱀의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하물며 타락한 육신과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자족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간절히 우리 안에 충만하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족은 내 스스로가 아닌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3)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이제 세 번째 주제로 넘어가 봅시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절)고 고백합니다. ‘주 안에서’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ἐν τῷ ἐνδυναμοῦντί με)’는 바울의 말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 모든 것(πάντα)
모든 것은 말 그래도 모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애를 살펴 보십시오. 바울이 자신이 하고 싶고 원하는 ‘모든 것(판타 πάντα’)을 한 적이 있었나요? 아니요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했고, 걱정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기꺼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분명 문자적으로 직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무엇일까요?
- 내게 능력 주시는 안에서(ἐν τῷ ἐνδυναμοῦντί με)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직접 바울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아시아에서 길이 막할 때 환상을 통해 새로운 소명의 장소인 빌립보로 인도했습니다. 유라굴로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바울에게 나타나 모든 생명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바울은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으며, 항상 함께 했습니다.
예수는 바울에게 ‘능력 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그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내면 예수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하시면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즉 ‘주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주 안에’ 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모든 것’은 욕망이나 교만에 의한 갈망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스스로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평탄한 길만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위협, 배신과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모호한 상황 속에서 고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때 우리에게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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