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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9. 4:21-23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샤마임 2019.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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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4:21-23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 말씀 읽기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2. 묵상

 

1) 문안하라(Ἀσπάσασθε)

 

바울은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빌립보서는 후서가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볼 때 두 번 이상 편지를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빌립보서를 쓴 후 교회는 그런대로 평화를 찾고 문제를 해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기와 반목으로 인해 분열하고 경쟁하는 교회에 바울은 십자가의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메시지를 전함으로 화평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대안을 찾기보다 다시 복음으로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방법들은 임시적인 방편에 불과하며,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문제가 발생하고,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가장 완벽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삶의 중심에 십자가를 놓아야 합니다.

 

바울은 편지를 마치면서 가장 복음적인 교훈을 다시 들려줍니다. 그 첫 번째는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서신들의 대부분은 말미에 문안하라고 권고합니다. 특별히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문안에 대한 권고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권면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문안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 문안은 동등함을 드러낸다.

 

고대세계에서 문안은 상위계급이나 동등한 신분에서만 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하인이 주인에게 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하고, 신하가 왕에게 하는 것이 문안입니다. 또한 친분이 있거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신분상의 동등함이 보장된 사이일 때 가능합니다. 문안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베스도가 부임했을 때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문안(ἀσπασάμενοι)’했다고 소개합니다.

 

. 문안은 연합과 친목을 도모한다.

 

문안은 동등성을 너머 친목과 연합을 도모합니다. 가식적인 문안이 아니라면 문안한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열고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면서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안은 친밀성과 연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 문안은 화평을 추구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그 집에 들어가면 평안하기를 빌라’(10:12)고 말씀하십니다. 평안이란 단어는 다른 곳에서 문안으로 번역된 아스파라스테(ἀσπάσασθε)’입니다. 구약의 샬롬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며,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살펴본 문안하다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의 특징이 분명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성도는 차별과 구별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서로 화평하고, 연합을 구하며, 친밀함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문안은 교회의 많은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심방은 문안의 일종이며, 낙심한 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문안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한글 번역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모든 성도(πάντα γιον)에게 문안하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성도는 어떤 성도들일까요? 그것은 문안함에 있어서 어떤 차별과 구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잠깐 제럴드 호돈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이 지도자들은 바울의 안부를 '각 성도'에게 전해 주어야만 했다. 여기서 바울은, 비록 놀라운 사실이긴 하지만, 매우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는 여기서 판타 하기온(πάντα γιο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단수형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용어를 '모든 성도들'이라고 번역함으로써 그 용어가 지니고 있는 단일성과 독자성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의도적으로 단수형을 사용함으로써 각 교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애정을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모두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분열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도 바울은 그 어느 편에도 치우지지 않았으며 각 성도들에게 그의 애정과 안부를 전해 주었다. 바울이 그의 일반적인 습관과 달리 이 마지막 인사말에서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적지 않는 목회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따라 문안합니다. 돈이 많은 성도나, 권력이나 명예를 가진 자들에게만 문안하려 합니다. 이것은 악한 행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빈부귀천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들과 뜻을 모으는 사람에게만 문안하지 말고,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분명히 못 박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에 있는 자들

 

모든 성도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자들입니다. 즉 믿음 안에서 하나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예수를 머리 삼아 지체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배타성을 전제합니다. 문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잃어 버린 자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자들에게 문안해야할 의무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종 그 어떤 집단보다 배타적 속성을 가지니다.

 

바울이 말하는 문안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서 문안은 영적 친밀함과 믿음의 연합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믿음이 없는 자들과 영적 교제를 나눌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철저히 배타적 속성을 전제합니다. 복음은 비밀이며, 그리스도를 앎은 성령의 계시를 받은 자가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문안을 받으라

 

22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편으로 빌립보 교회의 안부를 묻고 있는 이들을 소개합니다. ‘모든 성도는 아마도 바울의 측근에서 빌립보 교회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쓴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22절에서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이사의 집은 로마 황제와 관련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인이나 관리, 귀족, 또는 그 집에서 일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습니다.(제럴드 호돈)

 

흥미로운 점은 현재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 옥에 갇혀 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저작 시기를 1차 수감시기로 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쓴 다음 얼마 가지 않아 석방됩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비록 감옥이었으나 자유롭게 활동했고, 손님을 맞이하거나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일반 감옥이 아니라 자택연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바울은 계속하여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로마서가 빌립보서 이전에 기록된 것이라며, 바울이 로마에 오기 훨씬 전부터 복음이 로마에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행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기쁨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가이사는 앞으로 엄청난 핍박을 자행할 네로황제였습니다. 네로황제는 부패하고 간교한 자였습니다. 술에 중독되어 살았고, 정신착란증에 걸린 정신질환자였습니다. 그런 네로의 집에서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빌립보교회에 소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칼빈은 궁정에서 거룩함이 미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라며 놀라워합니다.(칼빈주석 <빌립보서>) 이러한 소식은 복음의 위력과 능력을 보여주며, 좌절하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Ἡ χάρις τοΚυρίου ησοΧριστοῦ )

 

마지막 인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 가운데 있기를 축원함으로 마칩니다. 바울은 편지의 첫 인사와 끝 인사를 은혜로 엮습니다.

 

1:1-2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4: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명백합니다. 첫째,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은혜의 수여자이십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머물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하지 않고 (κύριος)’를 붙이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자신들의 (κύριος)’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문둥병이며, 제국을 소통케 하는 것으로 고발했습니다. 이러한 반대 속에서도 바울은 교회의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오직 그분만이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나가면서

 

성도의 문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영적 공동체의 행동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녀들은 믿음으로 연합하며,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교회의 하나 됨은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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