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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5. 4:1-3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

샤마임 2018.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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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5. 4:1-3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

 

1. 말씀 읽기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2. 묵상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바울은 다시 빌립보교회로 눈을 돌립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묵상할 주제입니다. 땅은 부패와 불순종, 눈물과 슬픔이 존재합니다. 서로 반목하고 시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땅은 세상이며, 삶이며, 살아가야할 소명의 공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땅에 심는 자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하늘을 땅에 심을까요?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사랑함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1) 주 안에(ἐν Κυρίῳ) 서라

 

가장 먼저 주목할 구절은 주 안에서입니다. 주는 퀴리오주님입니다. 예수님의 로드십(Lordship)을 인정해야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주 안에 서라고 당부합니다. 2절에서 분쟁하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충고합니다.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7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킬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ἐν Κυρίῳ)’서 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계획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주 안에(ἐν Κυρίῳ)’서 생각하고 판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중심과 근거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 안에 서라’(1)는 구절을 더 살펴봅시다. ‘서라는 헬라어 단어인 스테케테(στήκετε)’는 말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5:24, 고전 16:13 ). 이 단어는 보초가 경계를 서듯 주변을 주의하는 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서서 경주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서는 것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럼 주 안에 선다는 말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로드십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인다운 사명, 삶을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야할 자리는 주 안입니다. 그런데 발을 딛고 살아가야할 지정학적 공간은 십자가의 원수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마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광야는 빈 공간이 아닙니다. 그곳은 생존의 위협을 매일 겪어야 하는 전쟁터입니다. 하나님의 가시적 부재는 불신의 유혹을 받아야 하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은 안전을 위협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갈이나 사나운 짐승은 목숨을 노립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광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기적이 필요한 곳이자 임하는 곳입니다.

 

2)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교회의 치명적인 결함은 한 마음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시기합니다. 그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경쟁합니다. 심지어 바울까지 경쟁의 대상으로 보고 바울이 갇힌 것을 이용합니다.(1:15)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만 세속적인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러한 그릇된 생각들은 빌립보교회를 분열시키고, 제대로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듭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들입니다. 제랄드 호돈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단순한 두 사람이 아닌 두 부류로 봅니다. 즉 유오디아파와 순두게파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초대교회 안에 흔하게 일어났던 분열중의 하나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은근한 자부심을 갖으나 바울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된 사람들은 철저히 바울을 따랐고 존중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사람들이 갈려 누구는 바울을 좋아하고, 누구는 베드로는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열심 있는 믿음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종의 시기였습니다.

 

마음(φρονέω)’은 빌립보서 안에서 무려 7번이 넘게 사용된 바울의 마음을 잘 드러내 주는 단어입니다. ‘마음(φρονέω)’은 프넨(φρήν)에서 왔으며, 프넨의 뜻은 생각하다’ ‘이해하다는 뜻입니다.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상황을 분석하여 바른 생각을 갖는다는 뜻을 갖습니다. 즉 이성뿐 아니라 믿음으로 한 의지를 갖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3) 도우라(συλλαμβάνω)

 

이제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이제 도우라는 권면을 합니다. 앞서서 마음(φρονέω)’이 이성과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3.4절에서 바울이 동역자들을 도우라는 권면에서 확실해 집니다. 그들의 갈라진 마음은 결국 복음을 일을 함에 있어서조차 협력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경쟁함으로 나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서로 자신이 주의 뜻을 구한다고 자랑합니다. ‘너보다 내가 더 주님께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모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시는가? 일을 잘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인가? 사회는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물론 팀웍을 위해 성경이 좋은 사람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을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일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는 곳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깁니다. 이곳이 교회입니다. 바울은 마음을 합할 뿐 아니라 서로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서로 경쟁함으로 인해 복음에 힘쓰는 저 여인들과 바울의 동역자들을 돕지 못할 수 있습니다.(3) 바울은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바울은 이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은 광야와 같은 곳이며, 끊임없이 믿음의 시험을 받아야하는 곳입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야할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땅에 진리로 서야합니다. 즉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사명의 본질이라면, 협력은 사명을 이루는 방법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돕는 것은 복음을 위한 헌신이자 짐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일이란 명분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시기합니다. 하나님은 일보다 사랑을 원하십니다. 서로 협력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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