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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들 4) 갈릴리 해변가의 조식만찬(요 21:1-23)

샤마임 2019.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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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갈릴리 해변가의 조식만찬(21:1-23)

 

[여기서는 복음서 다른 곳에서 나오는 비슷한 병행 구절들(예를 들어 눅 5:1-11)과 비교하지 않겠습니다. 연대기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요한복음 21장만의 문제로만 다루겠습니다.]

 

부활 후 제자들의 행적을 살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본문은 바로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제가 부활 후 제자들의 행적을 시작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와 다시 소명을 주시는 주님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니면 베드로의 수제자직에 대한 강조 등으로 쉽게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제자들의 행적에 대한 의미들에 비추어 본다는 요한복음 21장은 전혀 다르게 읽혀질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후대의 기록인 요한복음이 왜 20장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21장이란 부록을 추가했을까요? 이제 그 이유를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는 요한에의 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세 번째 현현입니다.(21:14) 여기서 말하는 세 번째는 엠마오를 제외한 세 번째 인듯합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고 다르게 부활 후 예수님의 현현을 꼼꼼히 챙기고 있습니다. 부활 저녁의 현현, 그리고 여드레 후 도마에게 나타나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조석으로 이어집니다. 갈릴리 호숫가로 가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이 결말에 해당하는 2030-31절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여기서 명맥하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합니다. 또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요한의 설명은 요한복음 1장에서 선언했던 내용과 합치하며,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무리 된 것 같은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왜 더 추가된 걸까요? 요한 무슨 의도로 갈릴리로 간 제자들을 찾아간 것일까요?

 

-제자들은 왜 갈릴리로 갔는가?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먼저 그들이 갈릴리로 가기까지의 여정을 추론해 봅시다. 주님은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무덤에서 만났습니다. 그 다음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갔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때 복음서 저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삽입합니다.

 

마태복음 28:7-10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마태와 마가는 천사들의 입을 통해 갈릴리로 가야 한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경우는 장소에 대한 언급 없이 마리아에게 아버지께로 올라가야한다는 말만 합니다.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자 그럼 누가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는 세 번에 걸쳐 설명합니다. 먼저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두 천사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누가복음 24:5-7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두 번째 서술은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25-26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마지막 세 번째 부활 저녁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4: 46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사복음서를 비교하면 마태와 마가는 갈릴리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누가와 요한은 부활 후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 즉 승천할 것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마도 누가의 전승을 그대로 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로 장소를 지정함으로 탈()예루살렘 성향이 강하게 두드러집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대체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운집의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부분의 생애와 초기 사역이 이루어진 갈릴리야 말로 최적의 장소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후기 편집 부분에서도 갈릴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은 열한 제자가 예수께서 정하신 갈릴리의 한 산에 이르러 경배하고 지상명령을 받는 것으로 마칩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에 대한 이미지는 정확히 예루살렘을 대체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생각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시작하면서 에 오르셨고, 제자들에게 새로운 언약의 말씀들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시온산인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잘 알았습니다.(2:3)

 

이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야하는 이유는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지만 마태가 말하는 갈리리와 요한이 서술하고 있는 갈릴리는 근본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마태는 산이지만, 요한은 해변가입니다. 또한 마태는 제자들이 경배했지만, 요한은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동일한 갈릴리 지역이지만 두 내러티브가 연계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의 난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요한복음의 저작시기와 상황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기록되었고, 최소 80년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는 네로의 핍박과 도미티안(Domitian) 황제 핍박의 중간 시기입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왔던 베스파시안이 로마로 돌아가 황제가 됩니다. 그러나 796월 죽게 되고, 그의 아들 디토스가 예루살렘 멸망을 맡고 로마로 돌아갑니다. 베스파시안 황제의 죽음 이후 디토스가 황제의 자리를 이어 받고, 90년 갑자기 죽임을 맞이하고, 그 뒤를 이어 도미티안 황제가 등극하여 96년까지 로마 황제로 통치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 시기에 기록되어 묵시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 반면 요한복음은 의외로 느슨하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습니다. 학자들 간의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필자는 네로와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 사이인 베스파시안과 디토스 황제 통치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예수는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목자이시며, 창조주이십니다. 부활 후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승귀를 말하는 것이며, 창조주로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잠깐 톰 라이트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할 때, 그는 재정의의 몇 가지 층위들을 열어놓고 있다. : 현재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삶, ‘내세의 생명이 현재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것을 이미 누릴 수 있고 그 생명은 육신의 죽음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미래로 이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몇 가지 점에서 저작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먼저는 지금까지 저술된 세 복음서(그 이상일 수 있지만)를 시대적 요청에 맞게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목격자들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네로의 핍박과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점점 사라져갔고, 요한 자신 또한 살아갈 날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교회 안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고, 오해가 있던 것들을 자신만의 시각에서 새롭게 저술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순교자들에 대한 변호가 필요했습니다. 특히 21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순교는 교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곁을 지켰고, 교회의 기둥으로 지내온 것을 감안하여 베드로의 순교를 변증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정말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습니다.

 

요한신학의 대가인 스몰리는 당시 교회 안에서 심각한 기독론적 차이로 인해 교회가 분열 위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예수를 메시아나 선지자로만 여기는 에비온파와 그 비슷한 성향의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 출신이거나 이방인들로 구성된 예수를 신적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경우는 헤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스몰리의 추측은 요한서신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의 교회 안에 이 두 집단의 예수의 진정한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나, 육신으로 화하신 그 말씀의 신비를 온전히 보지못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십중 팔구, 각자의 독자적인 신학적 입장을 지니는 집단 간에 알력이 빚어졌을 것이며, 그 경우 서로 사랑할 것(15:12)과 교회 안에서 하나될 것(17:11,21-23)에 대한 요한의 역설은 전적으로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이제 현안들은 바울 시대의 그것 같이, 율법의 위치와 교회의 선교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단순하지만 중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품성에 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시기를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까지 잡는다면, 당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가현설이었습니다. 일부의 학자들은 가현성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요한일서 속에서 이미 가현설의 초기 증상들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초기영지주의와 말시온의 경우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성육신도 거슬리지만 부활 후 몸의 부활은 그들로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육신을 입으심과 몸의 부활을 강력하게 부정합니다.

 

요한복음은 헬라 철학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헬라 철학을 옹호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로고스가 바로 사람의 몸을 입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이릅니다. 요한은 이러한 의도 속에서 예수님의 7가지 기적과 7가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장치를 사용합니다. 요한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적고 난 다음 21장을 추가한 이유는 바로 교회 안의 갈등을 바로 잡을 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이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했으며,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 곧 예수님께서 몸의 부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친히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나누어 먹은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사도들에게 권위를 실어주고 있습니다. 부활 저녁 제자들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당시 중요하지 않게 간과했던 예수님 말씀을 다시 추가적으로 삽입하여 자신의 가르침이 절대 거짓되거나 개인의 생각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앞으로 30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싸워야할 기독론의 정수를 마지막 증인으로서 요한복음 안에서 쏟아 놓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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