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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디모데전서 1장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샤마임 2020. 2. 22.

[장별설교] 디모데전서 1장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쉬지 않고 곧바로 제4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의 열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알까요?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풀려나 4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디모데에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2-3차 전도 여행 동안 디모데와 디도는 한 몸이 되어 서로 긴밀하게 연합하여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디모데의 경우는 1:2에서도 표현된 ‘믿음 안에서 참 아들’로 표현하고 있을만큼 바울이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디모데가 어떤 연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4차 전도 여행 때는 합류하지 못했고, 바울은 디모데를 걱정하며 목회자의 자질과 사역의 방법 등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지도하려고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3에서 언급한 ‘에베소에 머물라’는 표현에서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디모데전후서가 62-3년에 기록되었고, 바울이 네로황제의 초기인 65년 즈음에 순교를 당한 것을 감안한다면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고, 감당해온 목회사역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디모데에게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목회서신으로 불리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중에서 디모데 후서가 가장 늦게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디모데후서로 가면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던 때문인지 디모데후서 4:7-8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후서 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배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가장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 자신의 사역을 위임하고 유언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제들을 생각하며 목회서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데모데전서 1장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2절 인사

2. 3-11절 바른 복음을 가르치라

3. 12-27절 바울의 고백

4. 18-20절 선한 싸움을 하라

1. 인사(1-2절)

다른 서신서와 동일하게 디모데전서에서도 자신의 사도됨을 먼저 고백하며 인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의 명령을 따라’가 추가됨으로 다른 서신서에서는 볼 수 없는 엄중함과 권위에 대한 복종이 깃들어 있습니다.

ㄱ.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하나님은 작정하시고 예수를 통해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이유자이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표현합니다. 소망은 종말론적 단어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ㄴ.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됨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명령(에티타케 ἐπιταγή)’ ‘신적이며 왕적인 명령에 대한 연상을 수반한 강권적인 명령을 의미’합니다.

ㄷ. 믿음의 참 아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2. 3-11절 바른 복음을 가르치라

바울은 4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에베소에 들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의 상황을 보며 디모데를 남겨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홀로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 등이 있는 마케도냐 지방으로 건너갈 때 디모데에게 에베소를 지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수도 역할을 했던 대도시였고, 경제와 철학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에베소교회는 신학적 깊이는 있었지만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여러 정황상 에베소가 잃어버린 첫사랑은 행위 없는 믿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말은 있고, 지식도 있고,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해박한 정보는 가지고 있었지만 진작 하나님에 대한 앎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그지없었던 것입니다.

4절에 보니 에베소교회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몰두’라는 ‘프로세케인(προσέχειν)’은 단순히 정신이 팔린다의 뜻을 너머, 정신과 행동을 지배하는 정도의 강력한 몰입을 의미합니다. 신화와 족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면 복음과 대치되는 잘못된 생각과 논쟁을 일으키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리 알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세상의 무익한 논쟁들을 말합니다. 4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러한 논쟁을 ‘헛된 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7-11절까지에서 말하는 율법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대한 것이라면, 이들은 분명 유대적 영향 아래에서 구약의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은 옳지 못한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정죄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율법의 목적은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위한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떻습니까? 5절에 의하면 교훈의 목적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른 교훈’(10절)을 따르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교훈’을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따른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방식이자 목적입니다.

3. 12-27절 바울의 고백

바울은 자신이 그 교훈, 즉 복음을 맡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1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소개되는 바울의 모습은 결코 충성된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13절) 그런데 이러한 일을 행할 때 바울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13절)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바울을 긍휼히 여기셨고, 그를 택해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모든 삶과 생애를 바쳐 복음 사역에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명확히 알고, 그것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찬송가 310장의 가사를 생각해 봅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으로 가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해 식사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인이 들어와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 사람이 만약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어떤 여인이라는 것을 알텐데’ 그때 주님께서 오백과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모두를 탕감해 준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눅]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바울이 바로 그런 여인과 같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헌신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 아는 것과 그러한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것에서 나옵니다. 많이 사함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고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4. 18-20절 선한 싸움을 하라

이제 마지막으로 선한싸움을 싸우라고 권합니다.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 영적 전쟁이 시작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그 날까지 영적 전쟁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니 믿음에 파선한 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어,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주석가 헨드릭슨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는 가해진 징계-신적 교육법-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에게 유익한 결과를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가 소원하고 기도하는 바는, 이러한 지독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이 거짓선생들이, 자신들이 가증한 죄인들임을 깨닫게 되고,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되어, 그들이 더 이상 진리를 헐뜯거나, 그로인하여 그것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비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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