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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로강단-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어(이성복목사)

샤마임 201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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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어

(룻기 4:13-17)


  네덜란드의 한학자는 룻기를 가리켜 사사기와 사무엘상하라는 딱딱한 조개껍질 사이에 끼어 있는 진주라고 하였습니다. 룻기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특히 인간의 삶 가운데 고난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작품을 만드시는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경험할 수 있는 성경이다 말하였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로서 시작합니다. ‘기근’과 ‘장례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4장에서는 ‘풍요’와 ‘결혼식’으로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나오미 가정의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룻기를 통하여 슬픔이 변하여 찬송의 은혜를 경험하길 소원합니다. 


첫째, 슬픔 가운데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네 부류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압 땅에서 잃었습니다. 이민의 꿈이 무너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가능성 제로의 인생이었습니다. 룻은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어렵게 살아야 했습니다. 보아스는 많은 성경학자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일찍 아내를 여의고 자녀 없이 혼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베들레헴 거민들은 정치는 혼돈과 흔들림,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시국은 침략이 끊어지지 않는 불안 가운데 있었습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재료로 삼아 멋진 작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오히려 축복의 삶으로 가게 하기 위한 것이요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오미 가정에 눈물이 없었다면 진정한 축복을 찾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을까요? 고통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오겠습니까? 눈물 밖에 없을 것 같았던 그 땅에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제하시고 찬송을 터져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룻기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무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에 묵묵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아픔을 견디며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고통은 사랑받을 자로서 자격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배우와 같지만 모든 것을 연출하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오미의 텅 빈 손에 생명의 회복자요 노년의 봉양자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헤셋드의 삶을 원하십니다.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나오미 가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템을 계발하는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헤셋드의 삶을 통해 서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헤셋드는 남을 위해 책임 있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헌신이요 충성입니다. 룻의 헤셋드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는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룻를 보십시오. 이 여인은 이방여인입니다. 모압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모세의 가르침 때문에 실제로 베들레헴 여인들은 룻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룻은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며느리라고 여인들이 평가합니다. 아들은 기업입니다. 그러나 헤셋드의 삶을 살았던 룻을 이제는 정통 이스라엘의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자라고 평가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술도 먹지 못하고 담배도 피우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은 삶을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헤셋드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자로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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