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얼굴, 고전 13:8-13
얼굴
고전 13:8-13 2021년 2월 28일 주일낮 설교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며 많은 고민에 쌓여 있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할 교회가 세상보다 더 못한 것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습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펜을 들었습니다. 세 번의 편지를 썼는데 첫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이고, 두 번째 편지는 소실되어 아직도 발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 후서는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상당히 밝고 가볍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전서의 경우는 수많은 문제가 상존했기 때문에 대체로 무겁고 침울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다양한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 무리를 지어 편을 가르는 분열이 있었고, 두 번째는 성적 타락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 되지 못한 분열에 있다고 보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사용합니다. 문제를 하나하나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사랑 없음’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당을 짓는 것도, 성적 타락도, 은사의 문제고 결국 사랑이 없어서 일어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갑자기 사랑이 무엇인지 오직 사랑만을 위해 고린도전서 13장을 전부 할애합니다. 고린도전서 13을 빼고 12장에서 곧바로 14장으로 넘어가도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고전 13장은 논리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고전 13장은 모든 것의 중심이요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설파(說破)하기 시작합니다.
1-7절까지는 사랑에 대한 정의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설명합니다. 그러다 8-13절까지는 사랑의 속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지식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9절부터 12절까지의 주된 내용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지식에 대한 것입니다. 분명히 8절에서 지식도 폐한다고 했는데 왜 다시 지식의 문제로 넘어가는 걸까요? 사도바울이 급하게 편지를 쓰다 논리적 오류를 범한 걸까요?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하려다 지식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낍니다. 이제 우리는 고전 13장 후반부를 살펴보면서 바울의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의 포괄성
첫 번째 사랑의 특성은 포괄성입니다. 즉 모든 것은 사랑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9절을 보시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구약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모세도 다 알지 못합니다. 엘리야, 아브라함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에 한계, 공간의 한계,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단코 위그루 족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불과 100년 전의 사람들의 생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지금’ ‘여기’의 것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만을 경험하고 압니다. 사실 그것도 온전히 알 잘지 못합니다.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폐한다고 말합니다. 즉 쓸모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태양이 떠올랐는데 굳이 가로등을 켜둘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읽고 있으면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분적인과 온전한 것을 비교합니다. 부분적인 것은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이고, 온전한 삶은 완전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영원한 천국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약간 극단적인 해석이며, 바른 해석은 복음이야 말로 완전한 것입니다. 복음만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온전한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은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은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합ㄴ다. 사랑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며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2. 사랑의 성숙성
두 번째는 사랑은 모든 것을 대체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폐한다고 말합니다. 11절에서는 이것은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과 비교합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아이 때 했던 생각, 행동들을 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린 아이 때 하는 언어와 행동이 뭘까요? 미성숙한 모습을 말합니다. 이기적이고, 편협적이고, 독선적이고, 육적인 삶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12장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12장은 어떤 은사가 가장 좋은 은사냐 고린도교회가 서로 싸우는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방언이 최고다. 방언이야 말로 최고의 방언이다. 방언도 못하는 신자는 2류 신자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예언이 진짜 은사다 방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해석하고 전해 주는 것이 진짜다’라고 대응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몸의 비유를 통해 손이 다른 지체들에게 손이 최고라고 말하고, 발은 자신이 제일 고생하니 자신이 최고라고 말한다면 진정한 한 몸이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바울은 12;2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므로 최고의 은사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은사, 사랑 없는 기적, 사랑 없는 능력, 그것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고, 요란스러운 푸닥거리에 불과합니다.
[고전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탈무드에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마을에 머리가 둘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한 참 지나 동네 사람들이 갑자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면 이 아이는 한 명일까 두 명일까 아무리 논쟁을 해도 해결이 나지 않고 회당의 랍비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뜨거운 물을 한쪽 머리에 부어보라 만약 다른 쪽 아이도 함께 비명을 지른다면 한 명이고, 아무렇지 않으면 두 명이다. 사랑 없는 공동체는 가짜입니다. 합리적 근거와 추론,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라할지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필요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야 말로 모든 가짜를 대체하는 진짜이며,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의 깊이
세 번째 특징은 사랑이 갖는 깊이입니다. 12절을 보면 지금과 ‘그 때’를 비교합니다.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본다고 말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거울은 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지금의 거울처럼 밝지 못합니다. 현대와 비슷한 최초의 거울은 16세기 유럽의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져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고 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댄다는 것은 보다 정확하게 서로를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얼굴의 의미는 이러한 앎과 지식의 문제에 국한 시키지 않고 전인격적인 의미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고대세계로부터 지금까지 얼굴은 그 사람의 전체 또는 전부를 의미했습니다. 특히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는 곳이 얼굴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평판과 연관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댄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신분의 동등성을 말합니다. 지금은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신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들은 신분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어른을 함부로 쳐다보는 것을 무례한 것으로 여깁니다. 고대세계에서 신분이 천한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 귀족이나 왕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대화할 때는 땅을 쳐다보고 대화를 했습니다. 왕이 상대방을 높여줄 때는 ‘고개를 들라’ 또는 ‘얼굴을 들라’ 말합니다. 신분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서로 친하지 않는 사람끼리는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성경 안에서 죄를 지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갑니다.
창세기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요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계속 볼 수 있나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1973년 신중현이 부른 <미인>이란 노래를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나 한 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나는 몰래 그 여인을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모두가 넋을 잃고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나 한 번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최고의 친밀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며 존중하는 것이며, 가장 친밀하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완성은 바로 서로가 서로를 가장 가까이서 마주보는 것입니다. 서로를 깊이 알고, 부족하고 허물많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안아 주는 것이 이것이 바로 얼굴과 얼굴를 맞대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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