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손의 수수께끼, 삿14:1-18

샤마임 2021. 2. 20.
반응형

삼손의 수수께끼

삿14:1-18

 

수수께끼, 이것은 무엇일까요?

아침에는 다리가 넷이요, 정오에는 다리가 둘이요, 저녁에는 셋인 것은?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수수께끼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수수께끼입니다. 삶을 정의한다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요, 그 답을 얻기 위해 찾아 떠나는 낯설은 여행입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인생은 수수께끼로 뒤덮인 수수께끼의 삶, 그 자체입니다. 애써서 그 답을 찾으면 또 다른 수수께끼가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것을 풀면 그 다음 수수께끼가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난 삼아 풀어보는 수수께끼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이 미래를 결정하고, 생사의 문제가 걸린 것이라면 결코 우습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인생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으며 인생 그 자체가 또한 수수께끼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풀어야할 수수께끼는 없습니까?

 

수수께끼로의 초대

오늘 성경은 우리를 수수께끼의 세계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 말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삼손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수수께끼를 잘 푼다면, 여러분이 가진 인생의 수수께끼도 한결 쉽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삼손은 어떤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습니까? 혹 이것은 아닌 지요? 키는 280센티, 몸무게는 250킬로, 근육질에 반곱슬머리에 얼굴은 무표정한 모습에 검게 그을린 모습..

그러나 성경은 삼손의 외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나실인이란 이유로 머리카락이 길었다는 것 말고는!

 

-삼손 story의 위치-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분량에 있어서도 기드온보다 조금더 길며 다른 사사보다 가장 깁니다. 그리고 삼손의 사사의 역할도 다른 사사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그래서 그가 과연 사사로 불려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분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사란, 지도자요 인도자인데 삼손은 그를 따르는 사람도 없고 하는 일도 혼자서 다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나실인이면서 도덕적으로 보면 가장 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삼손이야말로 가장 큰 수수께끼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상식의 선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며, 우리와 닮은 존재입니다. 그의 소명과 그의 실패는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삼손은 사는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현재의 저희들과 너무 똑같습니다. 삼손의 모습은 먼 옛날, 그 옛적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자신의 욕망 때문에 갈등하는 삼손, 바로 우리들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삼손의 수수께끼는 우리의 수수께끼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삼손의 수수께끼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그의 수수께끼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삼손의 수수께끼

삿14:14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아주 이상한 수수께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문제를 풀지 못해서 삼손의 신부를 위협하여 그 답을 알아냅니다.

삿14:18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결국 삼손은 게임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그들의 교활하고, 간사함에 분을 내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18절 하반절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삼손의 실패이유는 자신의 신부 때문이었습니다. 16, 17절을 보면 그의 아내는 블레셋인들의 협박으로 인해 울면서 삼손에게 답을 알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가르쳐 주세요! 절 사랑하지 않으세요? 사랑한다면 가르쳐 주세요” “안돼! 이건 나의 부모님께도 알려주지 않는 거야!” “그래도 가르쳐 주세요, 제발 이요, 제발!”

결국 삼손은 아내의 눈물에 지고 말았습니다. 세상 어느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의 눈물을 이긴단 말입니까? 오, 가장 약한 자의 눈물이여, 가장 강한 자를 이겼도다! 우린 여기서 앞으로 일어날 삼손의 어두운 실패의 그림자를 봅니다. 그 강한 삼손이, 몇 톤이나 되는 가사의 성문을 헤브론 앞까지 들고 간 괴력의 삼손이 아무 힘도 없는 여인의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결코 눈물의 여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죄인의 회개하는 눈물을 이길 수 없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 주의 하셔야 합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이제 시작입니다.

 

-수수께끼의 중요성-

여러분은 삼손의 수수께끼 안에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또 다른 수수께끼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삼손의 수수께끼는 그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딤나의 여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 딤나의 포도원에서 사자가 그를 죽이려 할 때, 삼손에게 갑자기 여호와의 신이 임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 사자를 염소를 죽이듯 너무 쉽게 죽여 버립니다. 몇 달후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만나러 가는 중에 그 죽은 사자가 궁금해서 그곳으로 가봅니다. 그런데 사자의 시체는 썩은 것이 아니라 메마른 날씨 때문에 말라 있었고 그 죽은 시체 안에 꿀벌들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놀라서 외칩니다. “우와! 벌꿀이다” 히네, 아다크, 레보림! 삼손은 너무 좋아서, 시체 안으로 손을 넣어 벌꿀을 긁어내서 그것을 먹으면서 갑니다. 그리고 그 벌꿀을 부모님께도 드립니다. 그러나 그 꿀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삼손은 이 경험을 마음에 담아 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혼인잔치의 수수께끼로 사용합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이것이 무엇이냐? 답은 죽은 사자에게서 얻은 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수께끼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풀어보면,

먹는 자 즉, 사자는 먹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먹을 것이 나옵니다. 역설입니다. 강한자, 역시 사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단 것 즉, 부드럽고 온유한 것이 나옵니다. 강하다는 말은 포악한, 거친 이란 뜻도 됩니다. 그런데 그 거칠고 포악함 속에서 단 것, 즉 부드럽고, 온유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설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히브리어로 ‘사자’가 때로는 벌꿀이라는 말로도 사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풀어도 수수께끼입니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수수께끼의 의미-

이제 수수께끼를 조금씩 풀어봅시다.

첫 번째, 체험에 근거한 것: 즉 구원하시는 하나님

이 수수께끼는 먼저 삼손의 영적인 체험에 근거합니다. 삼손이 원래부터 힘이 세거나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사자를 죽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삿14: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삼손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사자를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이것은 사사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사사들에게 자신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옷니엘이 그랬고(3:10) 기드온이 그랬고(6:34) 입다가 그랬습니다(11:29). 아무리 약하고 연약한 자라도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사자도 염소새끼처럼 찢어 죽이는 강력한 용사로 변화됩니다. 삼손이 죽인 사자는 어린 사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젊은 사자입니다. 삼손의 사자를 죽인 체험은 그냥 우연하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삼손은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강력한 사자 같은 블레셋이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너무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가문의 왜소함을 강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임하자 고작 삼백명으로 십팔 만 오 천명을 물리쳤습니다. 기드온 뿐입니까? 어느 팔십세의 노인은 그 당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어린 십대의 소년이, 3미터나 되는 거대한 골리앗을 넘어 뜨렸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이것이 삼손의 수수께끼의 첫 번째 비밀입니다.

 

두 번째는 감추어진 존재로서의 삼손입니다. -거룩함. 즉 경건의 비밀을 간직하라.

이제 저는 여러분을 삼손의 두 번째 비밀의 방으로 인도하겠습니다. 13:17에서 삼손의 부친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 18절 “왜 내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다”

‘기묘자’의 뜻은 ‘비밀’, ‘이해할수 없는’이란 뜻입니다.

14:4 후반부에는 ‘그 부모가 알지 못하였더라’

6 삼손이 그 부모에게 ‘고하지 아니하였다’

9 역시 “

13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16 후반부에 ‘그것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이뿐 아니라 나중에 들릴라에게도 자신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고하지 않으려 합니다. 삼손은 철저히 숨기워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비밀을 계속하여 캐내려 합니다. 왜 그렇게 싸우는 걸까요? 삼손은 자신을 감추려하고, 블레셋인들은 알아내려하고... 바로 이 비밀 안에 삼손의 소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 두 번째 비밀의 방안에는 바로 이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16: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이게 삼손의 수수께끼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구요? 상관 있습니다. 삼손의 사자를 죽이는 체험은 여호와의 신의 강림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의 강림은 아무에게나,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의지 속에서 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의지는 다름 아닌, 자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성령의 충만을 입었고, 제자들도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통하여 구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의 강림은 철저히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신은 거룩한 존재요, 죄와 함께 할수 없으시기에 거룩을 전제로 합니다.

신약에서는 신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성령이 임함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왜 너희 몸을 더럽히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책망했습니다.

고전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삼손의 사자를 죽인 체험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룩함에 있습니다. 나실인,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존재로 거룩히 구별되고, 죄와 분리된 이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삼손을 강하게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를 성도답게 하고, 신자를 신자답게 함은 바로 거룩함에 있습니다. 세상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고,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 그리고 힘은 거룩에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삼손이 이 놀랍고도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을 간직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농담거리로 주고받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체험을 옷을 구하고 돈을 버는 목적으로 사용했고, 자신을 죽이려고 계획한 블레셋의 음모도 아랑곳 않고 들릴라의 애정행각에 자신의 그 비밀을 팔아 넘겼습니다. 당연히 지켜야 될 비밀을 아내가 눈물을 보이며 애걸하자 그것을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왜요? 아내의 사랑을 버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소명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뇌하고 번뇌하다 결국 세상의 쾌락을 위해 자신의 소명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경건의 비밀을 잃어버린 불쌍한 삼손은 눈도 빼냄을 당하고, 짐승이 되어 맷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사자를 죽였지만, 죽은 시체 안의 꿀을 버릴 수 없어서 나실인임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꿀을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블레셋이라는 사자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세속적이고 탐욕스런 쾌락의 꿀을 먹음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내 암소를 밭 갈지 아니하면” 왜 아내의 눈물에 자신의 경건을 팔아야 합니까? 그 암소는 부정한 꿀입니다. 들릴라, 부정한 꿀입니다. 부정한 꿀은 먹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도 하나님께 거룩한 성도로 부름 입고서도 세상이 주는 부정한 쾌락과 기쁨에 눈이 멀어 게걸스럽게 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이 너무 좋아서, 친구가 너무 좋아서, 세상이 주는 명예가 좋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어기고 그것들을 따먹지는 않습니까?

거룩, 거룩, 성도(聖徒), 이것이 삼손의 수수께끼 두 번째 비밀입니다. 성도가 거룩하지 못하면 죽은 사자가 되어 세상의 비웃음거리요, 장난감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음으로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바벨론의 비웃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편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수수께끼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놀라운 수수께끼를 발견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사자이듯 블레셋에게는 삼손이 사자입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블레셋을 대항하여 일어나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삼손을 죽이고 나서 삼손이 그랬던 것 삼손이라는 존재를 꿀처럼 따먹다가 결국에는 그들도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포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비웃었던 바벨론 또한 망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시체 안에 있는 부정한 꿀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오직 거룩해야 합니다. 그것이 살길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순결하여 지는 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세 번째, 이제 삼손의 세 번째 비밀의 방을 열어 봅시다. -사자 보다 강한 자

18절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수수께끼의 답입니다. 묻겠습니다. 이 답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렸습니다. 블레셋은 아직 모르는 게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꿀보다 더 달고, 사자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답은 이곳에 있습니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잠16:24]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에 속한 체험이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 이제 사자보다 강한 것, 삼손입니다. 왜요? 그가 사자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 답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묶어집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단의 권세와 궤계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임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삼손의 성령 임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이신 목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거스려, 온전히 말씀이 통치하는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자는 말씀에 철저히 붙들린 자입니다. 말씀이 그를 붙잡으면, 그는 사자처럼 강력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신33:22에서 단에 예언합니다.

 

신 33: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단 지파를 말씀으로 붙들고 계셨습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결코 전쟁에서 지지 않을 그 말씀으로 단 지파를 붙들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세워진 자, 그가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 한 사람으로 블레셋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있는 한 결코 망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리면 그것이 우리를 승리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저주는 말씀을 거두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야말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새롭하시는 강력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참된 사자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야곱은 이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창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자로 표현합니다. 유다의 지파의 사자입니다.

계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 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정으로 강한 사자는 곧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밀입니다. 거듭나지 못하면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나가면서,,,

여러분에게 삼손의 수수께끼는 있습니까? 놀라운 구원의 기쁨과 소망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체험과 거룩한 부르심의 소명을 간직하지 못하고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다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꼭 붙들려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그렇습니다. 오직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비결을 임을 잊지 맙시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강하게 하시며, 승리하세 하십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것을 소유해야 합니다. 세상이 모르는 이 놀라운 체험을 간직하십시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설 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 보물, 마태복음 6:19-29  (0) 2021.02.28
[설교] 얼굴, 고전 13:8-13  (0) 2021.02.28
설교 삼손의 수수께끼  (0) 2021.02.20
요한복음 6:1-13 열두 바구니  (0) 2021.02.06
요한복음 2:1-9 물과 포도주  (0) 2021.01.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