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삼손의 수수께끼

샤마임 2021. 2. 20.

설교 삼손의 수수께끼

 

사람마다 개성이 있습니다. 개성을 어느 누구는 Dook's 성격이라고 하는데 별로 좋은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성있는 사람들

10여 년 전 - 서면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멋진 아가씨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우연히 앞을 지나쳐 가는데 놀라 기절할 뿐 했다. 몸내는 20대 얼굴은 70대

 

어떤 분은 굳이 ‘별사슴’(스타벅스) 커피만을 고집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분은 말을 해놓고 의심을 눈빛을 보이기만 하면 바로.. ‘내기할래?’ ‘얼마에 할 래. 천원빵’ 하여튼 말만 꺼내면 내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기녀’라고 부릅니다.

 

우리교회도 개성이 넘치는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개성을 ‘다양성’ ‘풍성함’으로 해석합니다. 우리 모두가 70년대 공장처럼 회색톤의 페인트칠만 되어있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어야 아름다운 무지개마을이 될 것이 아닙니까? 사람마다 제각기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마음껏 사용하면 정말 재미있고 풍성한 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 저로는 비록 말 못하는 말치, 춤 못추는 몸치, 박자도 어눌한 박치 이지만 운치는 있습니다.

 

 

내기하는 삼손

 

오늘 성경 속에서 내기를 엄청 좋아하는 한 개성 있는 삼손을 만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키가 크고 덩치고 좋고 털이 많은 야성미 넘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떤 곳에서도 그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곳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삼손이 저와 같은 꽃미남 스타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키는 180 조금 안되고, 몸무게는 65정도, 허리는 32, IQ는 겨우 세자리 넘어가는 수준, 얼굴은 귀엽고, 깜찍한 그런 모습. 아닐까요? 정말 연약하고 약하디 약한 여린 갈대와 같은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번 성령에 붙들리며 사자와 같이 포효하고 당나귀 턱뼈로 순식간에 3000명을 때려잡은 위력을 소유한 그런 모습은 아닐까요? 하여튼 우리는 삼손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삼손은 연구대상입니다. 왜요? 삼손은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뒤덥혀 있어서 차근차근 생각해보지 않으면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괴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삼손은 우리가 아는 대로 괴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삼손의 그러한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 삼손이 머리가 밀린 뒤에 힘을 쓰지 못한 것을 보면 그 힘의 원천은 머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실인’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이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입니다. 머리는 나실인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이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나실 인이었지만 나실인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만을 자르지 않았다고 나실 인의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세 번째의 추측은 성령강림에 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삼손이 괴력이 생겨서 꽃미남에서 갑자기 헤라클레스로 변합니다. 14:6에서 사자를 죽일 때, 15:14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때도 역시 성령이 강하게 임해서 엄청난 괴력을 발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16:3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성령이 임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삼손은 가사라는 블레셋도시에 들어가 기생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16:3에 보니 밤중에 일어나 가사의 성문 짝과 문설주 즉 기둥을 뽑아서 헤브론 앞산꼭대기까기 끌고 갑니다. 몇톤이나되는 엄청난 무게의 성문짝과 문설주를 아주 쉽게 뽑아서 끌고가는 모습을 보며 삼손의 괴력이 성령 충만을 통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삼손의 괴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답은 모릅니다. 그게 답입니다. 왜요? 삼손은 수수께끼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삼손, 출생의 수수께끼

 

우리는 삼손을 보며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금은 수수께끼 같은 삶은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아무리 연구해도 답이 안 나온다. 망할 것 같은데 절대 안 망합니다. 죽을 것 같은데 건강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합니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분이 아닙니까?

삼손이 그중의 한명입니다. 이제는 저는 삼손의 수수께끼를 풀어볼까합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이런 것입니다.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좋아해서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14:5-6을 보면 부모와 함께 딤나에 인사하러 내려갑니다. 부모 상견례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가니 갑자가 사자가 나타납니다. 삼손은 사자를 그 자리에서 찍어 죽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사사기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며칠 후에 그 길을 다시 가다가 삼손은 죽은 사자를 보았고, 그곳에 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히브리 성경은 문장 서두에 ‘히네’라는 단어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뜻은 ‘봐라!’는 감탄사입니다. 그러니까 삼손은 죽은 사자와 그 속의 꿀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와우 꿀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약간의 놀람과 경탄이 들어가있는 외침입니다. 삼손은 죽은 사자에게 꿀을 따서 그 부모에게 갖다 줍니다. 그리고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식날 삼손은 블레셋 남자친구들에게 그 체험을 수수께끼로 냅니다.

‘우리 내기할래? 내가 수수께끼를내고 맞추면 겉옷, 속옷 삼십벌씩 내기로하자 우짤래 할래?’ 내기의 제왕 삼손다운 발상입니다. 삼손은 내기에서 자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자기 혼자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맞출 수 없는 그런 문제입니다.

 

14절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뭘까?

이런 황당한 세상에 이런 문제가 어디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마치 죽음에서 생명이 나오고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삼손도 자신이 내고있는 수수께끼의 진짜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자신이 경험한 사건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알았다면 이러한 것을 수수께끼로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수수께끼 안에 이루말할 수 없는 오묘한 진리가 숨겨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풀어봅시다.

 

1. 삼손을 공경한 사자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블레셋이고 삼손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괴력이 생겨 사자도 염소새끼 죽이듯 블레셋을 쳐부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삼손처럼 강력한 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

 

2. 또한 사자는 이스라엘 의미하기도 합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 그러나 하나님을 떠났을 때 오히려 패배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세 번째는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죽은 사자, 부정한 세상 속의 꿀을 먼지는 삼손-이스라엘. 그는 분명 나실인이며 시체를 만지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단맛을 즐기기 위해 부정한 욕망에 이끌려 사는 더러워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쾌락을 쫓아 부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재현해 내고 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타락한 성도의 자화상이요, 가나안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망각한 체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여기서 그러한 부끄러운 자화상을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수수께끼는 삼손의 수수께끼가 아니고 그러한 삼손을 사사로 세워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손의 출생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불임의 여자였으며,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임의 여자에게 하나님을 갑자가 찾아오셨고, 생명을 출생하게 했습니다. 죽은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보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위해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습니다. 답은 ‘기묘’입니다. 영어 성경은 기묘를 이렇게 풀어냈습니다.

 

KJV And the angel of the LORD said unto him, Why askest thou thus after my name, seeing it is secret?

NIV He replied, "Why do you ask my name? It is beyond understanding."

풀이하면 ‘몰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사로 세우실 때 이스라엘은 완전히 하나님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블레셋과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목숨이나 구걸하는 부끄러운 모습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심지어 15:13에 보면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에게 넘겨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왜 하나님은 삼손을 사사로 보내셨을까요? 사사답지 못한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는 삼손을 사사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답은 ‘몰라’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을 십자가에 보내셨습니까? 삼손의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아니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안고 살아가는 신비로운 존재들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수수께끼 같은 역사에 늘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왜? 왜 주님은 날 사랑하십니까? 왜 주님은 저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십니까? 왜? 왜?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당신의 은혜입니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설 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 얼굴, 고전 13:8-13  (0) 2021.02.28
삼손의 수수께끼, 삿14:1-18  (0) 2021.02.20
요한복음 6:1-13 열두 바구니  (0) 2021.02.06
요한복음 2:1-9 물과 포도주  (0) 2021.01.30
호세아 2:14-20, 광야의 밀담(密談)  (0) 2021.01.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