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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3. 3:12-16 푯대를 향하여

샤마임 2018.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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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3. 3:12-16 푯대를 향하여

 

1. 말씀 읽기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2. 묵상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목적이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부활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고, 고난 없이 영광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활은 죽음을 요구하고, 영광은 고난을 거친 후에 받게 됩니다. 기독교는 비록 죽음과 고난의 순간이 존재하지만 영광의 순간을 향해 나아갑니다. 얻기 위하여 버리는 것이지, 버림으로 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불교가 깊은 사유와 철학적 성찰이 존재할 수 있으나 생명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생명과 능력이 가득합니다. 오래 전 달라이 라마는 불교를 인과적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대개 인과적 의존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떻습니다. 인과적인 동시에 단절적입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죽음을 너머 부활을 향한 도전적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죽음 같은 삶에서 생명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1) 아직

 

바울은 현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얻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닙니다.(12) 또한 잡은 것도 아닙니다.(13) 바울의 고백은 영적 교만에 빠진 이들을 경계하도록 촉구합니다. 특별한 경험을 통해 영적으로 교만해진 이들을 주변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 절하합니다. 오래 전 방언을 하며 예언?을 하는 권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체험을 많이 경험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교만하고 성경에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질서를 어지럽히고 설교하는 목사를 향해 소리도 지르곤 했습니다. 그 분이 과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걸까요?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이고, 율법학자였고, 가말리엘에게 수학한 천재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삼층 천에도 다녀왔고, 안수해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의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아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며, 자기 이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완성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직 영화(榮化)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날마다 죄와 싸워야하고, 어제보다 오늘이 거룩해 지기를 애써야하는 성화(聖化)되어야 합니다. 성화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부족을 알기에 자만하지 않고, 아직 죄가 자신 안에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날마다 죄와의 싸움을 늦추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신을 알기에 타인들의 잘못을 긍휼과 사랑으로 안을 줄 압니다.


 

2) 지금

 

그리스도인의 열심은 단순한 열심히 아닙니다.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으며,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라톤 주자가 골인점을 향하여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12절에서 잡으려고(κατελήμφθην)’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는 붙잡다또는 ‘(범인을) 체포하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overtake로 어떤 대상을 추월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마음 또는 이성으로) 이해하다는 뜻입니다.

 

특이한 점은 12절 상반부인 예수께 잡힌 바에 사용된 단어와 잡으려고라는 단어의 원형이 람바노(λaμβάνω)’받다’ ‘붙잡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바울이 붙잡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정확합니다. 예수님께서 잡으신 것, 곧 예수님의 것이 바울의 것입니다.

 

형사가 범인을 잡기 위해 탐색하고, 정보를 모으고, 연관성을 찾고, 증거를 조합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추적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해할 수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련의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향하는 목적, 또는 푯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14)간다는 말은 자신의 삶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3) 계속하는 법

 

바울의 권면은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녀온 것들에 의심을 품지 말고,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은 봄나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이 있고, 위협이 있으며, 생존을 위협하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오래 전 승선실습을 떠났을 일입니다. 북태평양에서 태풍을 만나면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 때 배는 피하거나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폭풍은 배보다 빠르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폭풍을 이길 수 있을까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먼저 폭풍이 몰아치는 방향으로 선수를 향합니다. 그렇게 해야 폭풍에도 배가 침몰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엔진을 꺼버리면 안 됩니다. 속도를 낮추고 폭풍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계속가야 합니다. 멈추는 순간 배는 침몰할 수 있습니다.

 

폭풍이 오면 피해야할 것 같지만 사실은 폭풍을 향해 천천히 전진할 때 더 안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향해 조금씩 전진해야 합니다. 그로 인해 역경을 만나고 어려움이 찾아 온다해서 피한다면 오히려 더 위험해 질 것입니다.

 

나가면서

 

살아가는 한 움직여야 합니다. 생명은 끊임없이 살아가야하고 살아내야합니다. 정지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정확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이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성장하기를 멈춥니다. 자신 안에 숨겨진 죄와 탐욕을 부정합니다. 바울은 교만한 자들의 가르침을 버리고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또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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