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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1-12절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가 아니냐?

샤마임 202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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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1-12절

마태복음 7장 1-12절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가 아니냐?


1. 본문 읽기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태복음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마태복음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2. 강해


“비판하지 말라”(1절)


여기서 ‘비판’은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심판’입니다. 단순한 ‘평가’의 차원에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확정 짓는 것입니다. ‘너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고정시켜 버립니다. 이제 그에게서 선함도 좋음도 찾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해도 그 사람의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해 버립니다. 이러한 최종적 심판 또는 정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제하여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고 변화시킬 것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악한 생각 합니다. 완고한 생각들은 용서가 자리 잡지 못합니다. 사랑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처단하고 격리시킬 존재로만 대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의시킨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딤전 3:6)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악인이라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완악한 자들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3절)


티와 들보는 약점보다는 잘못된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즉 해석하고 바라보는 그 사람의 가치관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누구나 ‘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보’는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치명적 오류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들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티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아파합니다. 들보를 가진 사람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들보를 모르기 때문에 완벽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가치가 전복된 자들입니다. 속은 어둡고 악합니다. 겉은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그들은 속입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꾸밉니다. 안타깝게 그들은 자신의 겉모습이 자신의 속 모습이라고 믿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들은 외식으로 인해 양심까지 철저하게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타인의 ‘티’를 보려고 합니다. 티는 주의하여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파하는 소리를 듣고 그곳에 주목합니다.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고백하는 이들을 향하여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작은 ‘티’ 하나로 그 티가 그 사람의 전부라고 믿고 심판해 버립니다. 이것이 들보가 전부인 사람들의 속마음입니다.


“개와 돼지”(6절)

'거룩한 것'과 진주는 복음을 말합니다. 개는 이방인이고, 돼지는 부정합니다. 그것들은 율법 밖에 있으며, 계명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천국 밖에 있는 부정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부정함은 ‘무지’이며, 바른 이해가 없는 자들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개와 돼지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육의 것만 알고, 영에 속한 자들은 영의 것을 압니다. 개와 돼지는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영적 이방인과 부정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음으로인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 고린도전서 2장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분명 개와 돼지는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전정한 이방인과 부정한 자는 복음에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열릴 것이니라”(8절)

응답은 점진적입니다. 먼저 구해야 합니다. 구함은 갈망이고 마음의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찾아야 합니다.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습니다. 찾을 때 방황하고, 길을 잘못 들고, 실수하고, 실패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그곳을 발견하고 노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 가지를 세 단계로 구분했고, 세 단계마다 각각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고, 찾는 자는 찾아낼 것이며, 문을 두드리는 자는 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응답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는' '두드리는 이에게는' 그러니까 시도를 하면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시도하지 않으며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11절)

‘아버지’는 기도자의 대상을 환기시킵니다. ‘기도하는 너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다. 그러니 의기소침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는 좋으신 분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아버지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신학은 있으나 아버지가 없다면 죽은 신학입니다. 기도가 있고, 경건도 있으나 아버지가 없다면 그는 고아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자녀들이 좋은 것을 달라하면 뱀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아버지라면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얼마나 더 좋은 것으로 너희에게 주시겠느냐는 강조입니다. '하물며'라는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잘 담겨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응답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부분은 신앙은 무지와 막무가내가 아니라 추론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땅에서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 땅에 있는 그림자를 보고 존재의 원형이신 하늘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십니다.


“너희도 대접하라.”(12절)

이 말씀은 황금률로 부릅니다. 하나님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하셨습니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저(基底)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행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자신을 불의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의의 무기로 사용합니다.(롬 6:13)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형제에 대한 최종 판단은 아버지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 누구의 일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고아처럼 일하지 말고 아들처럼 즐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을 정경학적 관점에서 주해하고 강해한 것입니다. 기존의 글을 수정 보완하고 있어서 미완성의 글입니다. 시간되는대로 계속하여 수정해 나갑니다. 마태복음 연구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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