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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샤마임 202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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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마 9:9-13 

할렐루야! 오늘 적은 수 이긴 하지만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찬양 드립니다. 몇 주 동안 코로나가 잠잠해진 것 같아 들뜬 마음으로 예배 드렸는데 지난 주 우리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루도 편히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늘 예배를 통해 은혜 주실 자에게 은혜 주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리라 믿습니다. 

견물생심이란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의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뜻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의미를 가진 시가있습니다. 중국 송 나라 도교를 숭배했던 장백단(張伯端, 984~1082)이 지은 오언율시의 한 대목에 이렇 싯구가 있습니다.

“견물편견심(見物便見心), 무물심불현(無物心不現).”
“물건을 보면 곧 마음이 보이니, 물건이 없으면 마음도 드러나지 않을 것을.”

이 구절을 보면 견물생심과는 약간 다른 것 같지만 견물생심이 갖는 본의미를 더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견물생심은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긴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마음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며, 보인다는 것은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만약 정말 멋진 스포츠카가 지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차에 대해 관심도 없고, 차가 얼마나 비싼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멋진 차가 한대 지나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흘려버립니다. 심지어는 차가 지나가는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에대해 관심을 가지고 항상 갖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면 깜짝 놀라면 심장이 쿵딱쿵딱 뛸 것입니다.

보는 것은 마음이 있는 것이고, 마음이 가는 것은 보이기 마련입니다. 보는 것이 곧 내 자신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6장으로 가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발견합니다.

[마태복음 6:19-23]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보물로 생각하느냐에 대한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땅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늘에 있습니까? 오늘은 그 보물을 발견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은 산 농부와 같은 사람입니다.

마태를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 그곳을 떠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마태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아무런 대꾸도 저항도 없이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는 때 그 때 많은 제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10절)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묻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3절의 말씀은 호세아 6:6을 인용한 것입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장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함이 무엇일까요? 그들의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바로 ‘긍휼’을 요구하십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려한 제사는 드리면서 서로 사랑하지 못했고, 가식적인 거룩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데는 실패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자신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가서 배우라’라고 말합니다. 뭘 배워야 할까요? 그들이 배우지 못한 것은 뭘까요? 성경, 즉 하나님의 본래 의도하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자들이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의 마태이며, 세리입니다. 1세기 이스라엘에서 세리와 창녀들은 ‘죄인’들로 불렸습니다. 세리는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들이었고, 창녀들은 율법적으로 부정하고 더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11절을 보니 바리새인들을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란 표현은 바리새인들의 해석이며 관점이며, 그들의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거룩한’ 또는 ‘구별된’ 뜻을 가진 이름으로 자신들을 부르면서 타인들을 정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 비판하는 것을 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타인을 정죄하게 빨랐고, 어느 누구도 살리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라’라는 헬라어 단어를 는 ‘아코뤼세오(ἀκολουθέω)’인데  ‘따라가다’ ‘결합하다’ ‘제자가 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역된 본문들에는 ‘함께 걷다’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말이 뭘까요? 그것은 주님을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가고, 주님께서 하시는 행동을 따라하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서 그것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따르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자 주님은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4:26-27]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과연 주님을 따른다 말의 본질이 뭘까요?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자. 주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말씀은 어디 갈 데도 없다는 말입니다. 편하게 쉴 곳도 없고, 마땅히 거처도 없어서 날마다 방황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삶입니다. 그러면서 약한 자들을 돌보고, 마지막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는 삶,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본 회퍼라는 신학자는 ‘나를 따르라’는 구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름을 받았느니,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떠나라’는 말이다. 단어의 엄밀한 뜻대로 ‘밖으로 뛰쳐 나오라’를 말이다. 그것을 완전히 버리라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에서 떠나,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전망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생활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우연한 생활로 들어 오라는 말이다. 유한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떠나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드리히트리 본 회퍼 『나를 따르라』기독교문사, p54


오늘 주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를 보십시오. 그는 안정적인 삶을 과감히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안정보다는 믿음의 모험을 선택했고, 야망보다는 삶의 경이를 선택했습니다. 마태는 어떻게 이런 선택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경이로운 믿음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죽음에서 깨어났으며, 저주에서 벗어나 곧장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옮겨 갔습니다. 마태복음 13:6에서 주님은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마태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듣지 못한 것을 들었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갈릴리 청년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보았던 것입니다. 초라하고 가난한 사람의 너머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죠.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가 나옵니다. 마태는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을 때 어떤 상태였는가를 이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싶은 것이 분명합니다.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누가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실 때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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