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복음을 만나다 / 티모시 켈러
갈라디아서 복음을 만나다
티모시 켈러 / 김성웅. 이미정 옮김 / 베가북스
저자의 이름이 낯설다. 아직 나에게 티모시 켈러는 익숙하지 않는 탓에 감이 오지 않지만, 살펴보기를 통해 복음의 파수꾼임을 알아 챘다. 갈라디아서는 루터가 너무 사랑하여 결혼한 복음서가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부정과 긍정이 교차하는 모호한 복음서가 되었다. 티모시 켈러의 갈라디아서 강해집은 갈라디아서를 제자리에 세워 주었다.
앞서가는 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도 명확한 증거나 증언을 하지 않을 경우 앞서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확실한 증거나 명백한 증인이 없는 상황에서 단언하는 것 역시 어렵다. 용기가 필요하고, 시대와 본질을 통찰하는 안목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던 상황이 그랬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명확한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의 명확한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모호한 상황 속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교회를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예수, 믿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만으로는 부족하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충분히 못한 복음, 완전치 못한 복음이란 인식을 그들에게 심어 주었다. 기독교이 입교한 많은 이들이 기독교의 발원지라 할 만한 유대교에서 넘어온 거짓 교사들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진정한 복음을 붙들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짓교사들은 할례를 분명한 증표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예수를 부인하라는 말이 아니었기에 쉽게 빠져들어 갔다. 바울은 문제 앞에 당황했고, 심적으로 부담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그는 어떻게 진정한 복음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저자인 티모시 켈러는 '맨허튼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회중'을 이끄는 뉴욕 리디머 장로교회 목사이다. 성경의 불변성과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한다. 오래된 복음에 뿌리 내리고 있지만 진부하지 않다. 불변하는 진리를 설파하지만 답답하지 않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그를 멘토로 삼고 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말씀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오래된 복음을 재해석하고 풀어낸다. 시대 속에서 번역되어야할 진리의 말씀을 실존적으로 풀어낸다.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동일한 힘과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개정판 복음'(31쪽)은 없다. 혹 그런 복음이 있다면 변질 된 것이며, '복음이 아니다.'(32쪽) 복음 처절할 만큼 인간의 가능성을 꺾어 버린다. 그렇기에 복음은 혁명적이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 하나님의 열심에 있어서는 최고의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고찰은 내부자관점이다.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헌신과 사랑의 증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안에 숨겨진 인간의 치밀한 교만과 부패한 욕망의 메커니즘을 읽어 냈다. 복음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공로를 무위로 돌린다. 그래서 혁명적이다.
거짓교사들은 복음을 비판하지 않으면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교만을 살짝 건드렸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잘한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믿기 위해서는 할례만 더하면 된다.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잘못일까. 거짓교사들의 미끼에 걸려들었다. 99+1=100 이라는 공식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주장하는 1은 1이 아니었다. 100이었다. 사도바울은 그들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원색적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은 없다.'
구원을 받았으니 거룩하게 살라는 것과 거룩하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다르다. 그것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순서의 차이가 아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며, 감사이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한 거룩한 삶은 더 이상 기쁨도 감사도 없다. 만약 거룩한 삶을 통한 나의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면 예수는 더 이상 구원자가 아니다. 예수는 필요 없다. 1은 1이 아닌 100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91쪽)이라고 저자는 정확하게 정의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또한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는다.(93쪽)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감격 속에 사는 것이지, 구원 받기 위하여 발악하지 않는다. 복음만으로 부족하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복음만으로 충분하다면, 복음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구분의 조건이나 구별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복음은 '문화의 장벽'(146쪽)을 뛰어 넘고, '계층의 장벽'(146쪽)을 초월하고, '성의 장벽'(147쪽)을 허물어뜨린다. '우리는 은혜로 입양된 죄인들이다.'(148쪽) 죄인들끼리 자랑할 것이 있을까. 없다. 겸손과 자기비하만 있을 뿐이다.
복음만 필요하다면 더 이상 거룩한 삶은 불필요한가. 바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제시 한다. 저자는 열매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 한다. 열매는 '점진적'(235쪽)이고, '불가피'(236쪽)하며, '내면적'(236쪽)이며, '대칭적'(237쪽)이다. 열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과나무가 사과열매를 내는 것은 본성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조장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 즉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혹 나의 삶에 거룩한 열매가 없다면 거듭난 존재인지 의심해야 한다. 일반 사람들과 구별될 수 없는 탁월한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사랑은 흔적을 남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때문에 대가를 지불한 희생의 삶이 있는지 되돌아 볼 때다. 당신이 진정 거듭한 사람이라면 십자가만 사랑해야 한다.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거룩한 삶의 열매는 당연하지 않을까. 탁월한 설교자다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갈라디아서는 '다이너마이트'라고 말한다. 그렇다. 복음은 자기죽임 없이 세월질 수 없다. 죽고 다시 살아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은혜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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