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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갈라디아서2장 바울이 사사로이 제시한 복음

샤마임 2020. 1. 23.

[장별설교] 갈라디아서2장 바울이 사사로이 제시한 복음

 

갈라디아서 2장은 2:11에서 시작된 사도직 변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2장을 1-10까지와 11-21절까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론에서 바울은 자신이 계시에 따라 예루살렘 올라간 이야기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복음대로 살지 않는 베드로를 바울이 책망한 이야기를 함으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을 논증합니다.

 

1. 1-10절 두 그룹의 사도와 합의

2. 11-21절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1. 1-10절 예루살렘 방문에 복음을 제시하다.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어떤 시기를 기점으로 ‘십사 년 후’(1절)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올라간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을 호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를 따라’(2절) 올라갔습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는 말은 주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명령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제시’(2절)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제시하되 ‘사사로이’ 했다고 말합니다. 즉 공적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나누었다는 말입니다. 약간 의아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사도들의 허락을 받거나 인준을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베드로를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자신을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되는 것은 교회의 선택이나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직분이 하나님께 기원이 있기는 하지만 사도직은 다른 직분에 비해 좀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 줍니다. 바울이 제시한 복음을 듣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9절)

 

또 하나는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헬라인 디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갔음에도 그는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는 이유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4절)이었습니다. 거짓 형제 또는 거짓 교사들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4절 하)이었습니다. 바울은 5:1에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인해 오는 육신의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그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 자유는 이전처럼 죄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 갖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이끄는 대로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부르시고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이제는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아들입니다. 호세아 11: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있고, 당당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직접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들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빼앗아 내 던졌습니다.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5:10에서는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2. 11-21절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바울은 이제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을 언급합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때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12절 말씀에 의하면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는 이방인들과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야고보에서 온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방인들과의 식탁을 급하게 벗어나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일까요? 먼저 야고보라는 인물을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적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해 봅시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유대 전통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여전들이 그들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분과 혈통이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의 민족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다음 성경인 에베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복음은 혈통과 민족, 신분과 성별을 너머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함께 거리낌 없이 식탁교제를 나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고보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율법을 따라 행하던 본성에 의해 이방인들과의 식탁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비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먼저는 베드로는 유대인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행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강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나서 16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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