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8. 11:11-19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28. 11:11-19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1. 말씀 읽기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 묵상
11-19절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중간에 사라를 간략하게 함께 다룹니다. 동일한 믿음의 특성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1) 죽은 자에게서 생명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니는 열 살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이삭을 낳았기 때문에 당시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성경은 ‘나이가 많아 단산’(11절)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라는 아이를 낳았고, 결국 믿음의 여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 생육이 불가능한 사라
사라는 나아가 많아 생육이 불가능했습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나이를 훨씬 넘어선 것입니다. 사라는 나이가 들기 전에도 이미 ‘불임’의 상태였습니다. 창세기를 분명하게 ‘사래는 임심하지 못한다’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창 11: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성경에서 불임은 흔한 모티브입니다. 사라뿐 아니라 리브가도 아이를 갖지 못해 이십 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야곱의 아인 라헬도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한 참 후에 하나님께서 태를 열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등 많은 이들은 불임의 여성들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은 분들이 아이를 갖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에게는 아이를 낳는 것은 특별한 일이고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다른 사람들도 평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평범함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범함입니다.
- 믿음으로 잉태할 힘을 얻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동일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아이를 갖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야말로 사라가 가진 믿음의 능력입니다. 사라의 믿음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절)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 질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초기에는 단지 ‘민족’이었지만 후에는 ‘네 몸에서 날 자’로 좁혀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십구 세 때에는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는다고 말씀하십니다.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15:4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17:19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사라의 믿음은 하나님은 약속을 능히 성취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불임의 한 여인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를 통해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를 갖게 될 것입니다.
2)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함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몇 가지를 요구합니다.
- 떠나라
아브라함이 떠나야할 곳은 아브라함의 고향, 친척, 그리고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브라함이 떠나냐할 곳은 ‘아버지의 집’으로 총칭됩니다. 성경에서 아버지의 집은 안전과 평안을 상징합니다. 아버지의 집이 언급된 몇 구절만 찾아 봅시다.
창 20: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 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창 28: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사사기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심
아버지의 집은 그를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버지의 집에서 불러내어 광야로 이끄십니다. 나그네와 이방인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끝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보호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즉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야 함을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어 ‘아들’ 삼으십니다. 출애굽은 결혼식인 동시에 입양식입니다.
호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육신의 아버지를 떠나 하나님을 아버지 삼고 살아갑니다. 이 땅의 집이 아닌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사모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쁨이며 즐거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식적인 이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 한 성을 예배하심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3)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음
창세기 22장의 시험은 성경 중에서 난제 가운데 난제입니다. 키에르키고어가 <공포와 전율>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설하하기도 합니다. 케고어는 여기서 ‘도약’이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믿는 신앙은 이성적 사유로 불가능하며, 이성의 ‘도약’을 통해 하나님을 수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키에르케고어가 실존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매우 간단한 원리를 통해 아브라함이 믿음을 설명합니다. 논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ㄱ. 첫 번째 논증,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18절)
ㄴ. 두 번째 논증,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삭을 드려도 하나님은 자신이 죽인 그 이삭을 통해 후손을 허락할 것입니다.
ㄷ. 세 번째, 논증, 하나님의 전능
키에르케고어의 말대로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이성을 파괴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죽는 자는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모순된 것입니다. 믿음은 모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끌어안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직면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철저히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말씀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존재케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즉 죽인다 해도 하나님은 살릴 수 있는 분입니다. 19절의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는 정확하게 이것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믿음을 하나로 소개합니다.
롬 4:23-24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18-24까지의 내용은 정확하게 오늘 본문과 닮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창 15:6)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늘의 본향을 찾는 현재의 성도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살았고,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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