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6. 11:4-7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은 본다.
26. 11:4-7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은 본다.
1. 말씀 읽기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2. 묵상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믿음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아마 11장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비슷한 믿음의 형태를 가진 이들은 한 범주에 넣어 차례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1-10장까지 설명한 성경적 통찰을 딛고 믿음으로 영원한 본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믿음으로(by faith)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한 사람을 찾아가면서 선진들이 가진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아벨의 믿음
아벨의 믿음은 믿음 자체보다는 ‘말한다’에 방점이 찍힙니다. 즉 아벨은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2:24에서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를 비교하면서 다시 강조합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πλείονα)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 안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히 3:3, 7:23) 가끔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할 때도(7:23) 사용됩니다. 그럼 아벨은 믿음을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 더 나은 제사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질이 달랐습니다. 창세기 4장으로 가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는 소개되는 제물부터 다릅니다. 가인의 제사가 잘못되었다는 의미보다 정성이 없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첫 것’을 드렸습니다. 즉 자신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드린 것입니다. 소개되는 제물 속에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아담의 첫 것은 가인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첫 것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허무’라는 뜻의 아벨은 자신의 첫 것을 드렸습니다.
앞선 1-3절의 해석에 근거하여 아벨의 믿음을 조명한다면,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들을 확신했고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영원한 본향에 대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땅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경작하다’는 말은 ‘오베드’라는 히브리어에서 왔으며. 이것은 종과 노예들을 상징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극단적으로 해석한다면 가인은 저주 받은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더 나은 제물
학자들 간의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극명하게 그러나는 것은 가인은 ‘피 없는 제사’(민하)였습니다. 피 없는 제사는 독립적으로 드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더 나은 성품
가인과 아벨의 현저한 차이는 ‘성품’ 또는 ‘인격’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거절당한 이유는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배하도록 요구 받았지만 지배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동생의 살입니다. 제물과 예배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제물이 곧 그 사람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증언’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셨습니다. 놀랍게도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물에 대하여(ἐπὶ)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부분이 피의 제물에 관한 것이라면 아벨이 갖는 믿음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4절 후반에서 나타난 ‘아벨은 지금도 말한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와 삶을 믿음의 행위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아벨의 믿음을 온전히 해석할 수는 없지만, 아벨은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그는 삶의 동기와 과정, 목적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원한 나라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2) 에녹의 믿음
에녹의 믿음은 죽음을 이긴 믿음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9:27)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죽지 않았고, 이 땅에서 옮겨졌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에녹의 믿음의 핵심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5절)라는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동안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창세기는 ‘동행’(할라크)했다고 말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얻은 ‘증거’(μαρτυρέω)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믿음
믿음은 반드시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이 존재합니다. 그냥 믿는 것은 신념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신념이 아닌 관계서 일어나는 신용, 신의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을 상 주신다는 믿음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악하고 나쁜 하나님이 아닙니다. 선하시고, 사랑의 많으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들어 봅시다.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8:7-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성경이 다 말하지 않지만 에녹의 삶은 폭력과 배신, 악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나도 저들처럼 악을 행하리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의로운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기도했고, 사랑했고, 축복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며 살았습니다. 이것들이 그 증거들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믿음은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을 들어 봅시다.
요한일서 3:14-16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에녹은 율법적인 거룩이 아니라 살아 생동력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 사랑이며, 섬김이며, 헌신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믿음,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에녹은 하나님 때문에 하늘에 보물을 쌓았습니다.
3) 노아의 믿음
노아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일’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6절에서 정의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충만합니다.
-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확신하는 것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만 홍수의 심판을 경고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가 살아 있는 동안 ‘의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벧후 2:5) 하나님께서 세상이 악하므로 정죄하시고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것을 홀로 알지 않고 전파, 즉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이 땅이 전부인 것이양 깊이 현실에 뿌리내리며 살았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노아의 때’와 같다 하셨습니다. 그들은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만, 악한 평범함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는 기간은 인내의 시간이었고, 긍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벧전 3:20)였습니다.
노아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존재였습니다. 현대 배의 기준으로 5천 톤이 넘는 어마어마한 배를 만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노아를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방주를 짓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은 ‘허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관점의 차이고, 믿음의 차이입니다.
- 하나님을 경외(두려움)하는 믿음
경외는 공포가 아닌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노아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고, 모든 삶의 기준을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이라고 말합니다. 경외는 신뢰이며, 사랑입니다.
- 행동하는 믿음
노아는 행동했습니다. 즉 홍수가 올 것을 준비했습니다. 방주는 노아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자 믿음의 표현입니다. 아무도 주의 말씀에 관심이 없을 때 노아는 영원한 나라를 동경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방주를 짓는데 사용했습니다. 곧 이사 갈 집에 인테리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곧 홍수가 일어날 터인데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노아는 삶으로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믿음은 이 땅에서 어리석어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믿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결국 노아는 홍수의 심판 때 방주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독자들도 홍수와 같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밝히 드러나 복음에 순종하며 거룩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실제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가면서
아벨과 에녹, 노아의 믿음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벨이 그의 삶으로 믿음을 보였고, 에녹 역시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노아는 모든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며, 영원한 나라를 확신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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