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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선악과 나무의 비밀 3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샤마임 2011.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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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나무의 비밀 3 - 하나님을 아는 지식

1997년에 모 일간지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다시 중고등학교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가장 학고 싶은가?’라는 설문을 한 적이 있었다. 66.9%를 차지한 1등은 ‘공부’였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싫어한 것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앎에 대한 욕구야말로 식욕의 욕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욕구중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욕망 덩어리 그 차제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 같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의 대부분은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우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왜 배우고 싶어하는가? 앎이란 곧 신적 존재로의 회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와를 유혹했던 것은 ‘지식’이었다. 하나님만 아는 지식을 탐한 것이다. 지식은 곧 하나님처럼되는 가장 주요한 수단에 속한 것이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던 말을 들어 보라. 그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2:17에도 보면 아담과 하와가 먹었던 나무의 열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말한다. 즉 지식의 열매인 것이다.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화를 보면 그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그들은 과연 하나님만 알았던 지식을 얻게되었다. 그 지식은 무엇일까? 선악을 아는 지식이다. 알다는.. 야다, 성적지식 즉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타락전과 타락후의 앎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 전의 앎은 경험적 산물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이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들은 경험해 보지 않고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존재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아는 것을 예로 들어 봅시다.

술을 마셔보지 않은 사람들은 술에 대해서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술에 내용물, 술의 효과나 결과들에 대해 제3장의 입장에서 연구하여 논물을 쓴다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술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술에 관해아는 것이다. 즉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격리된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마약을 해 봄으로 마약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 육과 영혼을 파괴시키는 가를 안다. 마약을 해 봄으로 마약이 가지는 치명적 중독성과 인간의 힘으로서는 끊을 수 없는 엄청난 파괴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경험은 위대한 것입니다.

시편 119 : 100로 가보자.

시편 119:100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시편 119편은 우리가 잘 알 듯이 토라송이라 불리는 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함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곳이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100절이다. 노인은 인생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경륜의 힘을 말한다. 온갖 세상 경험을 다 해본 사람이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어떤가? 저때가 좋지! 모를 때가 좋아! 너희도 커봐라 그 때 알게 될거야! 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경험은 좋은 것이고 위대한 것입니다.

또다른 경험의 힘을 봅시다. 공감마케팅이라고 불리는 것인데요.

논문이나 연구조사보다 사람들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용후기입니다. 옥션이나 지마켓등에 가서 물건을 살 때 소비자들이 주의해서 보는 곳이 있다. 그것은 사용후기란이다. 아무리 상품이 좋다고 해도 사용해본 사람들이 ‘별로다’ ‘사용해 보니 정말 안좋더라’라고 말하면 사기가 겁나는 것이다. 요즘 한창인기잇는 페이스북에도 Like버튼이 있다. 사람들이 글이나 상품을 산뒤 리뷰를 달면 라이크 버튼을 누른다. 많이 추천된 상품을 사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검증되고 신뢰할만 하다는 뜻이다.

경험담의 위력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상품을 소개할 사용하는 입소문마케팅도 여기에 속한다. 기업이나 회사에서 사원을 선택할 때 어떤 기준을 보는가? 검증되지 않는 사람보다는 여러 통로를 통해 검증되고 인증된 사람을 높은 월급을 주며 채용을 합니다.

중고차의 가격이 싼 이유는 신뢰도 때문이다. 잘사면 괜찬치만 잘못사면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손해비용이 중고차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러나 신차가 비싼 이유는 이러한 불안요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 요소를, 위험부담. 리스크를 가지고 있으므로 싸다.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가 사는 모든 상품에는 이러한 불안요소를 제거해주는 신뢰도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왜 그토록 경험을 중요시하는지 어느 정도 증명이 된 것 같다. 자 이제 인류의 철학사를 잠깐 살펴 봄으로 지적 역사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곳에서 경험을 중요시 하는지 봅시다. 사실 수천년의 철학사를 단 몇줄로 평가한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는 일인줄 알지만, 그대로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봅시다.

철학사를 3단계로 나누면 먼저 그리스도로마를 중심으로한 고대철학의 시기, 기독교화된 로마를 중심으로 일어나 천년을 이끌었던 중세철학, 그리고 근대현대 철학의 시기입니다.

모든 철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가 있습니다. 상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던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가장 근본은 인간이라고 외친 프로타고라스의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물로 이 말에는 약간의 오해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철학이 가지는 근본적인 성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것이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게서 종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기본 전제들은 중세철학, 근현대철학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신학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중세철학의 시기에도 여전히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회의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 역시 신앙의 사람이고 경건한 신자였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통해 오직 ‘나’에게서 모든 것을 시작했다. 심지어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성자로로 불리는 켄터베리의 안셀름 조차도 ‘신존재증명’을 통해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통해서 충분히 신을 증멸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18세기에 불어닥친 계몽주의 합리주의는 어떤가? 역시 인간이 중심이된 철학사조들이다. 영국의 존로크에게서 발전된 ‘경험주의철학’과 헤겔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륙의 관념론’ 역시 모든 것의 중심은 인간들이었다. 심지어 합리주의를 버리고 실존주의로 넘어갔던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도 인간중심의 철학들이었다. 이 상대주의의 어머니라 불리는 실존주의에 대한 글이다.

실존주의는 무엇보다 위기의 철학이다. 이는 인간 실존과 그리고 우주적 실존의 전체를 위기적 상황의 연속으로 해석했다. 위기 상황마다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해소를 위하여 개인의 모든 내적 자원을 요구한다. 각각의 위기는 동일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새로운 위기를 불러일으키며, 전체 계열은 궁극적인 "파선"에 도달한다. 실존주의는 환명과 절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철학적 비관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궁극적 존재에 악을 귀속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 존재는 선과 악을 초월한다. 실존주의는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로 환원하는 허무의 철학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는 위기의 연속과 무와의 궁극적 대면으로부터 잘못된 위로를 도출한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실존주의 철학은 현재의 문화적 위기에 대한 근본적 대응이다. -프랭크 틸리의 [서양 철학사] 730쪽에서 인용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철학사의 마지막 줄에 닿아있는 실존주의에 대한 정의입니다. ‘파선’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철학사의 마지막, 최고의 지성들이라고 자랑하는 이들의 결론은 ‘위기’라는 단어를 통해 ‘파선’으로 종결지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알았던 선악을 아는 지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타이탄’은 그리스 신화의 거인족 티탄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는 이름에 걸맞은 규모를 가진 배였다. 화이트스타라인 선박회사는 1911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이 배를 만든 뒤 신화 속 거인족을 따 명명했다. 무게 4만6326t에 길이 259m, 너비 29m로 당시까지 세계에서 만들어진 증기여객선 중 가장 큰 배였다. 이 배를 만드는 데 2년이 걸리고, 외부를 꾸미는 데에 1년이 더 걸렸다고 한다. 이 배는 만들어질 때부터 서방 언론들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가 돼 큰 관심을 끌었다.

타이탄


영국 남부 사우스햄튼 항구를 떠나 뉴욕으로 첫 출항을 한 것은 1912년 4월10일. 하지만 여객선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출항한 지 나흘 만인 14일 밤 11시40분, 타이타닉은 북미 동부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거대한 빙산에 부딪혀 2시간 40분 만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승객과 승무원 2223명 중 15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 시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닌, 선박 재해로는 세계 최악의 사고 중 하나였다. 그나마 생존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배가 비교적 천천히 가라앉았기 때문이고,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은 것은 규모에 걸맞지 않게 구명보트가 너무 적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타이타닉 침몰


아담과 하와가 선택했던 선악을 아는 지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아버지는 떠난 탕자의 자유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려했던 인간의 비참함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수많은 시도들을 보지 않습니까? 로이드존스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시죠.

“현대에 우리들의 신들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육과 정치와 과학이라는 신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모두 신으로 만들고 숭배해 왔지만 교육은 점차 늘어나는 청소년 비행, 알코올 중독, 부도덕, 부정, 이혼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인류가 처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현재 이 시간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이 지난 몇 백년 동안 숭배해 온 최고의 신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은 그 동안 자기 자신을 숭배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0세기는 우리에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었던 나치 강제수용소나 러시아 강제 수용소를 들여다보십시오. 무죄한 사람들에게 원자 폭탄을 떨어뜨려 단숨에 날려버리는 인간들을 보십시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미 결혼한 다른 사람의 삶과 가정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 가정을 고의적으로 망가뜨려 놓은 인간을 보십시오. 그것이 인간입니다. 신문은 매일 인간이라는 신이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 앞에서 고꾸라져 낮아진 채 굴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논리를 비약시켰습니다. 인간의 경험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부연설명 없이 그 위대함의 결과는 비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좀더 경험의 문제로 나아가 봅시다. 인류가 선택했던 경험적 지식, 즉 자신이 주체가 되어 신이 되려했던 인간의 선택은 결국 자신을 파선에 이르게하는 필연적 운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이란 무엇인가? 피상적이며, 관계되지 않은 것이며, 아무런 변화의 힘도 없는 죽은 지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순종해 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명의 잘 모른다. 왜냐하면 좁은 생각,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의 견해로는 도무지 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을 해보면 그 때서야 아! 이거였구나 탄성을 지른다.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풀리는 것이다. 오해가 푸리고 이해가 된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는 차원이 다르다.

산에 올라가면 답답하고 애매하던 것들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프로는 아마의 수를 읽습니다. 초보는 프로의 수를 읽지 못합니다. 이상하게 보이고, 바보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방에 날립니다. 대가는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둔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지만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 초보는 신나서 앞에 있는 사람이 바보인줄 알고 깔보고 조롱하고 속으로 비웃습니다. 그러다 막판에 ‘아다리’하면 끝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신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불안적하며, 어리석은 편견에 사로잡혀 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알면 알수록 괴롭고 고민이 많아집니다. 지식의 역설이며, 앎의 아이러니입니다.

전1:18, 전12:12

[전]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 12: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딤후] 3: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인류의 타락은 지식이 피상적으로 되었습니다. 말씀하면 행위로 드러나는 능력이 아니라 단순한 사변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이 되고 말았다. 죽은 지식이다. 도덕시간에 배우지만 길에 쓰레기 버리고 신호 어기고, 거짓말 한다.

성경지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많이 알아서 신학자가 될수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죽은 지식, 구원하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지식에 불과하다. 야고보는 이러한 지식을 마귀적 지식이라고 말한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서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사탄도 알고 떠느니라.. 그러나 구원받지도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알고 있는 지식으로 상대를 죽이고, 괴롭히고, 거짓말한다. 주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하였단 할지라도 이들의 지식은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인류는 하나님을 떠남으로 선악을 아는 지식을 소유했지만, 그 지식은 결국 자신들을 배신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고통이요, 아픔이요, 버림받음이요, 슬픔인 것이다. 서로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마귀적 지식에 불과한 것들이다.

이러한 지식을 반전시킨 분 등장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 분은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가장 천한 모습으로 가장 연약한 자로 가장 가난한 자로 오셨다.

[히]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러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사는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삶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슴으로 그것을 이해했고, 몸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악을 그 몸에 짊어지신 것처럼, 바울은 형제 자매들의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한 것, 주리고 목마른 것, 헐벗은 것, 매맞는 것을 자기 몸으로 짊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대신 형제 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현명하게 되고, 강하게 되고, 영광을 받고, 배부른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그 자신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는 삶을 자처했습니다. 우리 말에 “발에 때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몸으로 살기를 원했던 바울은 스스로 발에 때만도 못한 삶을 자처했던 것입니다. 그 대신 형제 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귀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나의 구속의 은총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느냐?” 우리는 그 때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 주님, 알고 말고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기에(to be sin),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너를 통해서 현명하게 된 사람들이 있느냐? 너를 통해서 영광스럽게 된 사람들이 있느냐? 너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있느냐? 너는 형제의 짊을 대신 짊어졌느냐? 너는 나의 구속의 은총을 어떻게 네 몸으로 살았느냐?”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질문에 대답할 것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의 지식

생명의 지식으로

죽음과 고통이 깊게 드리워진. 강을 거너

생명과 소망이 약동하는 세계를 우리를 옮기십니다.

인류의 역사에 흐리는 저주를 끊고 생명이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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