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별설교] 고린도후서 3장 새 언약의 일꾼들
[장별설교] 고린도후서 3장 새 언약의 일꾼들
2:14부터 7:4까지는 바울은 사도직은 변증하는데 사용합니다. 물론 사도직 변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심 주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사도직을 변증함에 있어서 전제가 되는 복음의 성질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대변되는 옛 언약과 복음으로 대변되는 새 언약을 비교함으로, 새 언약의 우월성을 강조합니다. 새 언약의 우월성은 고린도후서 다음에 나오는 갈라디아서에서 더욱 강조될 것입니다. 3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 그리스도의 편지인 성도
4-11절 새언약의 일꾼의 우월성
12-18절 자유함을 주는 주의 영
1-3절 그리스도의 편지인 성도
첫 번째 주제는 약간 모호하지만 의도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가진 존재들입니다. 먼저 바울은 2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왜 갑자기 편지 이야기를 꺼낼까요? 1절에서 바울은 추천서 이야기를 꺼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예루살렘이 가진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종종 추천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추천서의 용도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신분을 보장합니다. 이단이나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전하는 복음을 신뢰할 수 있고,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추천서를 받지도 않았고, 일부러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굳이 추천을 받아 선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배우거나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남으로 말이암아 얻게 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시 중요하게 다룰 것입니다. 1:11-12, 15-17까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갈 1:11-12, 15-17]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로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사도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았는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열두사도보다는 바울에게 무게 중심을 더 둠으로 새로운 시대적 도전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받아 전해진 복음으로 거듭났으며, 그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2절에서는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11절 새 언약의 일꾼의 우월성
4-18절까지는 새 언약의 우월성에 대해 다룹니다. 이 부분을 두 곳으로 나누어 4-11절까지 먼저 살펴 봅시다. 이곳에서 바울은 율법으로 대변되는 옛 언약과 복음으로 대변되는 새 언약을 비교합니다. 두 언약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요. 먼저 6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은 무엇이고 새 언약을 무엇일까요? 먼저 옛 언약부터 살펴봅시다. 옛 언약은 율법의 조문으로 되어 있습니다.(6절) 그것은 구체적으로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돌에 써서 새긴 율법 조문’(7절)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옛 언약은 율법을 말하며, 율법은 곧 모세로 대표됩니다.(13절) 그렇다면 율법은 나쁜 것인가. 절대 아닙니다. 선하고 거룩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또한 율법을 전하는 직분도 고귀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율법을 전하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사건을 회상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출애굽기 34장 29-3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시내 산에서 내려오자 얼굴에서 빛이 났던 사건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세를 보고 신으로 경배할까 싶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 빛이 나지 못하게 합니다.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
그러나 옛 언약은 새 언약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옛 언약의 부정적 측면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ㄱ. 죽이는 것이다.(6절) 6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ㄴ. 없어질 영광이다.(7,11절) 7절 중반부를 보십시오.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 있는 영광이 ‘없어질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즉 임시적으로 잠깐 드러난 영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7에서는 ‘진동될 것’이라 표현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자세한 내용은 후에 히브리서를 강해하면서 더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ㄷ. 정죄의 직분이다.(9절) 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옛 언약, 즉 율법을 ‘정죄의 직분’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자세하게 표현하면 ‘정죄의 직분’은 율법을 전한 모세의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새 언약인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과 비교하려는 의도입니다.
정리해 볼까요?
옛 언약은 죽이지만, 새 언약은 살립니다.(6절)
옛 언약은 없어질 영광이지만, 새 언약은 영원한 영광입니다.(7-8,11절)
옛 언약은 정죄하지만, 새 언약은 용서하고 사랑합니다.(9절)
새 언약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지 못한 위대한 영광을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12-18절 자유함을 주는 주의 영
세 번째는 주제는 새 언약이 갖는 특징입니다. 새 언약은 분명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영’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즉 성령의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편지인 성도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율법 조문과 비교하며,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지식이나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18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바울은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를 것이라 예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주의 영’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광에서 영광으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신약에서 영광은 곧 하나님의 신성을 뜻합니다. Glory로 번역되는 헬라어는 ‘독사δόξα’입니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δόξῃ)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δόξῃ)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요한복음 1:4을 먼저 살펴봅시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자 보십시오. 예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며,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우회적 표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서 영광으로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성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영생을 얻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2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로 이것이 복음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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