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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고린도후서 11장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

샤마임 2020. 1. 17.

[장별설교] 고린도후서 11장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

결혼식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이제 신랑 신부가 입장합니다. 그런데 어떤 한 남자가 나타나 신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서 도망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11장 속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을 신랑인 예수님께 신부인 성도를 중매하는 중매쟁이로 소개합니다.(2절)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유혹하여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황당한 사건을 보면서 갈팡질팡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무엇이 진짜이고 참인지를 분간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아래와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5절 거짓교사들의 유혹

16-33절 참 사도의 표지들

1. 1-15절 거짓교사들의 유혹

바울은 11장을 시작하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해 달라고 말하면서 한 가지 염려를 토로합니다. 3절에 보니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아담의 타락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지금이 마치 그 때와 같다고 말합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수위가 높은 경고입니다. 4절에서 그 수위를 명확하게 표시합니다. 거짓교사들이 전파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다른 예수’와 ‘다른 영’ 심지어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에 대해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유심히 보십시오. 예수입니다. 그러나 다른 예수입니다. 또한 ‘영’이지만 다른 영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입니다. 겉으로는 예수이고, 영이고, 복음입니다. 그런데 속을 열어보니 다른 것, 즉 가짜였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14절에서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4절 후반부에서 ‘그런데도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정확하게 바울의 중매를 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는데 결혼식날 신부를 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고린도교회가 너무나 당연하고, 그리고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처음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해달라고 말했지만, 그 어리석음은 바울의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와처럼 마음이 부패하여 진짜 예수와 참된 영, 진정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다른 예수가 무엇인가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명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반부인 16-33절까지의 내용은 참고해 본다면, 다른 예수는 고난 없는 예수를 말합니다. 또 하나는 2-3절에서 추론해 본다면 거룩하지 않는 삶, 즉 타락한 삶을 계속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거짓 교설(巧說)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교묘하고 달콤해 보였습니다. 마치 사단이 하와의 귀에 속삭이던 그 달콤한 말과 같았습니다. 그로인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마음을 닫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는 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세상을 탐닉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바울에 이제 후반부에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복음, 진정한 예수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16-33절 참 사도의 표지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 예수 믿음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자랑이 시작됩니다. 먼저 22절을 봅시다. 먼저 대적자들은 유대인들로서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하는 교사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추천서는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쨌든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고후]11: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먼저 바울은 그들이 히브리인 것처럼 자신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인도 동일합니다.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입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23-27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어서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들을 들려 줍니다. 옥에 갇히고,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고,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았고,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세 번이나 배가 침몰하여 일 주야를 바다에서 표류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 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 마르며, 춥고 헐벗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까지 사지로 내몰았을까요? 28절에 보니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28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바로 세울까를 밤낮으로 걱정하고 고민했습니다. 누군가 실족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잠을 자지 못하고 가슴 아파했고, 누군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며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성도들을 볼 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 아파하고 또 아파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많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진정한 자랑은 누군가보다 탁월한 무엇이 아니라 성도를 사랑하는 그 마음인 것입니다.(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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