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에 대한 해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1-1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최초로 행하신 기적으로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기적이 일어난 날이 모호하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1장에서 6일을 흘러가게 하고, 2장의 혼인잔치를 제7칠일도 설정한다. 창세기 1장과 날짜적으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이 때부터 제자들이 '그(예수)를 믿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말씀을 통해 창조적 능력이 발현되는 사건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드러낸다.
말씀으로 치유하심. 말씀으로 창조하심과 비교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말씀으로도 충분히 치유하신다.
말씀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왕의 신하를 치유하심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또한 말씀을 보냄으로 치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유하실 때 말씀을 보내신다.
병자에 대한 치유는 부정에 대한 치유다. 38년은 정확히 광야의 시간이며, 오래되었으며 치유 불가능을 말한다. 주님은 이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정상으로 회복 시킨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8년을 강조함으로 앉은뱅이가 철저히 선에 무능했던 배역한 이스라엘의 광야 시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그를 긍휼로 치료해 주신다. 그는 다른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음을 입을 뿐이다.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만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입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이들을 인도하고 먹이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비유하신다. 떡은 양식이며,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된다. 광야의 떡과 참떡인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시적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인가의 차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당시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선언이고 기적인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혼돈과 무질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 사건과 연결됨. 땅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혼돈을 존재함. 이곳을 정복하심.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은 구원을 의미한다. 물은 혼돈과 모호함을 상징하며, 악마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에서 땅이 솟아 오르게 하셨다. 반창조인 홍수 사건은 땅이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물의 혼돈을 정복(발도 딛고)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즉 지배하신다. 물을 가르시거나,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적의 차이가 다르다. 주님은 단지 '물 위'를 걸으신다.
둘째날 물과 물이 갈라지고, 셋째날 물에서 땅이 솟아 나고, 넷째날부터 땅이 풍요로워진다. 마지막 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이 거할 집을 마련하셨다. 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며,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준비되었다. 인간의 창조의 끝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물 속에서 불러낸 땅(에레츠)에 인간을 두셨다. 광야가 혼돈의 공간으로서 물(바다)과 같다면 가나안은 물(광야)에서 불로내 에덴 동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철저히 출애굽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소경을 보게하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이다. 구약에서 소경을 보게한 적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메시아의 일이다. 육신적 봄은 영적인 각성이며, 영혼의 창조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과 유대 전통이 있다. 보는 것은 인식을 넘어 참여이다. 또한 향유이다.
소경은 봄으로 피조세계를 체험하고 향유한다. 주님은 그를 보게 함으로 육신의 차원을 너머 영적인 교훈을 더하신다. 육신 안에 갇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되심의 신성을 기적을 통해 체득한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본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유대인들은 보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지 못하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것들과 대치되며 역치되며 역전된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음을 알린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 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다. 기이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예수님은 마지막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통해 생명의 창조자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 복음의 7가지 기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기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난 것으로 부활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마지막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재림과 연결된다.
리처드 보컴은 이곳에서 5) 물 위를 걸으심(6:16-21)을 빼고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으로 넣는다. 이유는 물위를 걸으심의 이적 자체에 '표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의 그의 분석에 공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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