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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7:1-10 아간의 범죄

샤마임 202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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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아간의 범죄

수 7:1-10

 

참으로 위기 없는 인생은 없는 것 같습니다. 2020년처럼 위태로운 위기가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올까 싶지만 지나온 시간을 회상해보면 별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80이 넘으신 분들에게는 나라를 잃었던 일제강점기를 경험했을 것이고, 6·25전쟁과 1973년과 78년에 있었던 오일파동도 경험했습니다. 1998년에는 국가가 부도를 당한 IMF도 지나왔습니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코로나 사태는 그리 커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 크고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통계적 수치로만 본다면 결코 이전 위기보다 더 힘들다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우리 인생 가운데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은 또 흘러 갈 것이며 우리는 또 이겨 나갈 것입니다. 언제 코로나가 끝날지 모르지만, 코로나 사태가 다 지나간 다음에 지금을 회상해보면 아마 아름다운 추억처럼 그려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랬지. 주일날 예배도 마음도 드리지 못했고, 가끔 수요기도회와 새벽기도회도 몇 주간 쉰 적도 있어.”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몰라”

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아픈 고통도 세월이 연마한 추억은 영롱한 빛을 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이 시기를 유의하며 지나야 되며, 지혜롭게 대처해야합니다. 우리의 운명이 내일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는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인류의 문명사를 살피면서 역사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했던 나라와 문명들을 살폈습니다. 그는 모든 문명과 나라는 안정의 시기가 지나면 도전을 받고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몰락할 것인지,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것인지를 논했습니다. 역사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든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느 정도의 단계의 이르면 거기에 만족하고 그만 멈추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처한 운명은 자꾸만 변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운명은 인간에게 다음 단계로 올라가라고 도전을 던진다. 그 단계에 이르면 다른 도전이 와서 또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한다.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인간은 도전을 받고 살아간다.』

 

영적인 문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승리감에 도취되는 순간 그는 이미 퇴보한 것이며, 이미 영적 전쟁에 패배한 것과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천국에 발을 디딜 때까지 영적전쟁을 멈추지 못하며, 믿음의 경주를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여호수아 7장에는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위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모세에 비하면 여호수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불과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6-9]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수아는 힘을 얻고 결국 담대하게 진군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첫 성인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취하게 됩니다.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요새화된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여리고성을 발굴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성이 밖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전쟁에서 여호수아는 두 번째 성인 아이 성에 정탐꾼을 보내 그들을 정탐하게 되고, 결국 전부가 아닌 삼천 명만 보내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작은 성이라고 얕보던 아이 성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5절을 보니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그냥 넘기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마음이 ‘녹다’는 ‘마시스’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여호수아 2장에서 라합의 고백 속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 2:10 -1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 표현은 결국 가나안 주민들이 느꼈던 동일한 공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진명의 대상이 가나인 주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바친 물건(헤렘)’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할 여리고성에서 시날의 외투와 금과 은을 훔침으로 말미암아 그 저주가 이스라엘 전역에 미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에게 속한 가족과 모든 재산을 돌로 치고 불사릅니다.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짜기’로 불렀습니다. 아골의 뜻은 ‘고통’ ‘괴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위기가 찾아왔는지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첫 번째 위기는 여호수아가 정탐꾼의 이야기만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여리고에서 아이 성으로 보냅니다. 한글 성경은 ‘사람을’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이나 영어성경을 보시면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 명이 아닌 최소 두 명이상을 보낸 것입니다. 아마도 여리고성처럼 두 명을 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돌아와 소수의 사람들만 있으니 모든 백성을 수고롭게 올려 보낼 필요 없이 2-3천 명만 가도 이길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아마도 정탐꾼들은 신실한 이들이었고, 여호수아는 그들의 보고를 믿었습니다. 여호수아는 2-3천명에서 좀더 많은 것을 선택해 3천명을 보냅니다. 그런데 뜻밖의 패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잘못이 정탐꾼이나 정탐꾼의 말을 믿은 여호수아에게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 아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영적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3천명이 아닌 8장에 나온 대로 삼만 명을 보내면 이길 수 있었을까요? 아마 졌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간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어떤 작전이나 전술을 편다해도 질 수 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상황을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실패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면 아이 성의 패배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이런 우리에게 일어납니까?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십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려 있느냐?”

여호수아가 ‘왜’라고 묻자. 하나님 역시 ‘왜’라고 답합니다. 이 대화 속에는 ‘너는 왜 지금에서 와서야 나에게 묻느냐? 순서가 틀렸구나. 라고 답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서가 틀린 것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아이 성과 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면 절대 패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유는 딱하나 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신뢰한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절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없이 일을 처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기억해야할 중요한 원리는 법도 중요하고, 상식도 중요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히 겉으로 볼 땐 분명히 옳고, 바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영적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많은 헌신을 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도 있습니다.

 

2.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잃으면 모든 사건이 명료하면서도 빠르게 진행됩니다.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보고 판단한 바를 여호수아에게 말했고, 여호수아의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여호수아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첫 번째는 여리고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둘째는 여호수아가 너무나 일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날 때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모든 사건들은 항상 전조 증상이 계속하여 일어났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이 의외로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그렇게 복잡하게 보이는 사건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고,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거나 의의를 제가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마는 것이죠. 누군가 일어나서 ‘장군님 정탐꾼의 말도 옳고 장군의 말도 옳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봐야 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면 사건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미국의 트래블러스 보험사에 근무 중이던 윌리엄 하인리히는 보험 일을 하면서 특이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사망자가 1명 나오기까지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1명의 사망자가 나오기 전에 경사자가 29명이 나왔고, 29명의 경상자가 나오기 전에 잠재적 부상자, 즉 다칠 뻔한 경함을 한 사람이 무려 300명이었습니다. 다른 사건도 봐도 거의 비슷한 통계가 나오는 것을 보고 하나의 법칙으로 제시합니다. 이것을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300:29:1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이 법칙은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저 정도야 뭐 괜찮아’라고 말했던 것이죠. 결국 어느 임계점에 이르자 사건을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329번의 사건이 일어날 때 단 한 사람이도, 이상해, 이상해, 조심해야 되지 않을까. 문제가 있어. 주의해야 돼. 라고 말만 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7장 후반부로 가면 죄를 범한 아간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간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는 처음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아무런 죄가 없는 가족들까지 죽여야 하는가.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수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혹시 여러분 중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조금 이상함을 느낀 분이 있습니까? 바로 이겁니다. ‘그 물건들을 내 장막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입니다. 장막 아래 땅을 파고 그곳에 훔친 물건을 넣었는데, 가족들이 모를까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왜 가족 중의 단 한 명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까요?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면 굉장히 복잡하고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사건이 일어날 때 보면 이 모든 과정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이상한 정도로요. 우연에 또 우연이 겹치고, 또 다른 우연이 계속하여 겹치면서 ‘필연’이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단 한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바로 이점을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분명 옳지 못한데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닙니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딱히 뭐라 말하기는 애매한 상황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저건 아닌데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계속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일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진행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적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 누군가는 하나님께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영적 촉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소한 징후들을 주의하십시오. 

 

3. 선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아이 성의 패배가 여리고성의 승리 후에 왔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승리는 굉장히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위험한 시간입니다. 한 번 승리의 쾌감을 맛보는 자는 반드시 교만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2:27을 보십시오. 여리고성을 정복한 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고 말합니다. 왜 여호수아가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왜 정탐꾼들의 말을 쉽게 믿었을까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고 나자 두려움에 빠져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으로 용기를 주셨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고, 적들 앞에서 할례도 행했고, 여리고성도 정복하게 했습니다. 승리의 또 승리가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 때 사단이 여호수아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만의 독을 먹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영적 위기는 승리의 옷을 입고 오고, 영적 타락은 성령 체험이란 은혜와 함께 찾아옵니다. 아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이상하게 여호수아는 기도하지 않았고,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믿었습니다. 이모든 것이 합력하여 패배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혹여나 무엇인가 얻었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겸손하게 무릎 꿇어야합니다.

 

결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1:8 말씀대로 율법 책을 우리의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기록된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 생각의 흐름, 사고의 방향, 그 모든 것은 오직 말씀이어야 합니다. 경험도 내려놓고, 업적도 내려놓고, 오직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5일 후면 성탄절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해 봅시다.

 

1. 하나님 음성 듣기를 힘쓰라.

2. 영적 민감성을 가지라.

3. 영적 자만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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