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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통독일기] 2020년 1월 9일 목요일

샤마임 2020. 1. 9.

[성경통독일기] 2020년 1월 9일 목요일

 

목회자에게 있어서 성경통독은 필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목회자는 일 년에 최소 3독은 해야 한다. 솔직히 1독은 너무 적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평3주5로 성경통독법은 참으로 이상하다. 하루에 3장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개념이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독서법은 참으로 난해하다. 왜냐하면 하루에 3장을 읽으면 ‘겨우 3장’이다. 블레이즈 파스칼은 너무 천천히 읽지도 말고, 너무 빨리도 읽지 말라고 했다. 참으로 그 말은 맞다. 하지만 3장은 너무나 적은 분량이다. 도대체 하루에 3장 읽고 뭘 기억한단 말인가.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최소한 하루에 10장은 읽어야 한다. 필자는 장으로 읽지 말고 쪽으로 읽으라 권한다. 시편 1편은 고작 6절이다. 3편까지 해도 36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분량은 창세기 1장과 비슷하다. 그러니 하루에 쪽수를 정하고, 그 쪽수의 장까지 읽으면 좋다. 만약 구약 75쪽까지 읽어야 한다면 77쪽까지 읽어 창세기 47장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어쨌든 올해는 성경 5독 이상을 계획 중이다.

 

참으로 오랫만에 성경 통독에 들어갔다. 오늘은 시작하는 날이라 창세기를 모두 읽었다. 창세기는 50장까지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1장이 전반부를 이루고, 12-50장까지는 후반부이다. 전반부가 창조에서 바벨탑까지의 고대 역사에 속한다. 후반부는 아브라함의 소명부터 시작해 마지막 족장인 요셉의 죽음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구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왜 그럴까. 요셉과 하나님은 언약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현재 수요일마다 창세기 1장을 설교 중이다. 창세기 1장의 창소를 하루하루 살펴보고 있다. 창세기 1장을 예전 몇 번 설교하기를 했지만 하루하루 나누어 설교하기를 처음이다. 설교를 위해 조밀하게 성경을 읽고 주해하니 이전에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할 수 있어 좋다.

 

통동효과는 분명하다. 천천히 묵상할 때는 느끼지 못하는 반복과 재해석이 눈이 확연히 들어 온다. 예를 들면 창세기 2:25과 3:7의 대립은 기묘할 정도다. 비록 3:7에서는 ‘부끄럽다’는 표현이 없으나 확실히 부끄러운 느낌이다. 3:21에서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가족 옷을 입혀 주심으로 부끄러움을 덮어 주신다. 후에 바울은 옷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고린도전서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골로새서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왜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성경은 침묵하지만 의미는 분명하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벗겨진 것이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혀질 때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리라 말한다.

 

로마서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베드로전서 2: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인간은 본래 흙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주시며 영광을 덧 입혀 주셨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이 벗겨짐으로 자신들의 본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1장에서 아담에게 복주심이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에서 반복되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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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노아에게

[창 8: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9: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아브라함에게

 

[창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이삭에게

 

[창 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삭이 야곱에게

 

[창 28: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출애굽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는다면 ‘번성’은 분명히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나 그 번성으로인해 애굽은 이스라엘을 시기한다. 블레셋이 시기했던 것처럼.

 

족장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면 유난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표현이 많다. 이러한 표현이 등장하는 곳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언약)하신 후이다.

 

[창세기 12:7-8]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세기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세기 26: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그런데 야곱은 분명 이삭과 닮은 점이 많지만 ‘여호와를 불렀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도 물론 없다. ‘여호와를 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예배하다는 의미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창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4:26로 아벨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씨’로서 셋을 소개할 때 등장한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는 확실히 출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 광야에서 헤매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정체성, 가나안으로 가야 하는 이유 즉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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