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7. 2:12-18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7. 2:12-18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1. 말씀 읽기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2. 묵상
빌립보서의 주제는 ‘화합’입니다. 그들은 시기하고 분열했고 경쟁했습니다. 불행히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악의적인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겸손’과 ‘하나 됨’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곳에 있는 이유입니다. 세속적인 경쟁과 자랑은 교만이며, 소유와 권력에 의한 그릇된 명예로 인해 일어납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다시 복종의 문제를 언급하려 합니다.
1)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바울의 첫 번째 권면은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대체로 ‘칭의론적 관점’에서 서술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으라’가 어울립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합니다. 매우 특이한 형태의 명령은 지금까지 바울이 말한 신학적 주제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딕 루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 및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과, 다른 한편으로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 즉 그리스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는 것으로 의지와 할동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하나씩 교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확신 있게 의지하는 동시에, 활발히 추구하는 것의 혼합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자세한 방법을 살펴봅시다.
-언제나
첫 번째 조건은 ‘언제나’입니다. 바울은 ‘나 있을 때’와 ‘나 없을 때’(12절)에도 항상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은 바울이 보이지 않을 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성도다운 삶을 살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곳’에서 자신을 성도답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불신자보다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의 수준은 보이는 곳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자신입니다.
-복종하라
누구에게 어떻게 복종하라는 말일까요? 헬라어 원문 자체도 누군가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Ὥστε, ἀγαπητοί μου, καθὼς πάντοτε ὑπηκούσατε,”
그러나 ‘그러므로(Ὥστε)’라는 접속사에 의하면 12절은 앞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종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라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제랄드 호돈은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그것을 ‘너희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건강을 이루는 데 순종함으로서 힘쓰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복종이 행동에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함은 곧 서로를 사랑하며, 앞서 권면한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모든 행위들을 포함합니다. 빌립보 교인은 이러한 부분에서 많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두렵고 떨림으로(μετὰ φόβου καὶ τρόμου)를 좀 더 직역하면 ‘두려움과 떨림 안에서’입니다. 헬라어 메타(μετὰ)는 ‘함께’ ‘후에’ ‘곁에’라는 뜻을 가집니다. ‘두려움’과 ‘떨림’을 이용하여가 아니라 ‘함께’로 해석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받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여정이며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떨림은 한 번 이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간직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의미로서 받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구원을 받음을 과거형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악함을 거룩한 계명으로 비추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부당한 의심이 아니라 ‘거룩한 의심’입니다. 하루도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다는 연약한 죄인으로서의 정직한 의심입니다.
2) 구원을 이루는 방법
그럼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 갈까요? 구원의 여정 속에서 ‘두려움과 떨림’이 동반된 삶이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삶의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일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께서 ‘너의 안에서 행하시’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인식’입니다. 이루는 종종 하나님의 일하심을 망각합니다. 처음 시작한 은혜로운 섬김들이 후에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일만 남게 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유방식, 섬김과 헌신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일하십니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능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며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13절) 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지 않고 우리의 선한의지에 불을 붙이시고, 열정에 기름을 부으십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일하시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대의명분을 갖지만 거칠고 서툰 방식은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영국 속담에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지 말라’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의도적 배제를 통해 서로에게 상처 주는 어리석은 일들을 행했습니다.
-흠이 없고 순전한
‘흠’은 죄와 악을 뜻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흠 있는 존재가 되었고, 전적타락은 흠을 만드는 존재로 살아가게 합니다. 흠있는 재물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온전한 제물만이 하나님께 열납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드려지는 제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딕 루카스는 좀 더 신학적인 의미에서 ‘흠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그리스도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을 때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이다. 흠 없음은 결국에 가서 그분이 이루실 것이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온전함이었으며, 그리스도의 흠 없는 성품이다.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조차도 찾으실 수 없는 성품과 삶이다.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일부이며, 또한 구원 받은 자들이 부름받은 순종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면서 은혜로 이미 이루어진 것을 경험 속에서 이루어갈 때 우리 것이 된다.”
흠 없는 삶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와 비교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듯에 어그러지고 거스릅니다. 흠 없는 삶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행위는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순종의 열매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들입니다. 행동도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악한 행동은 ‘어둠’이 됩니다. 요한사도는 빛 안에 거함과 어둠 안에 머뭄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설명합니다.
요일1:5-7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생명의 말씀을 밝혀
생명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福音)을 말합니다. 복음을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이며 비밀입니다. 바울의 존재 목적이자 성도의 삶이 이유는 복음 전도입니다. 우리는 밝히는 것이 전하는 것이며, 해설이며, 순종의 행위인 것을 압니다. 입술로 드러내야하며,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3) 나와 함께 기뻐하라
이제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충고합니다. 바울의 기쁨에 대한 강조는 기쁨 없음에 대한 방증(傍證)이 아닐까요? 빌립보 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은 시기와 경쟁은 있으나 하나 되어 갖는 공동체적 기쁨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하나님께 드릴 제의로 비유하여 기쁨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너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바울 자신이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전제가 무엇입니까? 전제의 히브리어 ‘네세크( )’는 ‘붓다’ ‘쏟다’의 의미를 가지며, 신약에서는 봉사와 헌신을 뜻합니다. 하지만 원래의 사용된 곳은 구약의 제사법입니다. 번제와 소제, 화목제 등을 드린 다음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할 때 마지막에 포도주와 독주를 제물 위에 부었습니다.(레 23:13, 민 28:7 등) 바울은 자신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드리는 제사 위에 전제가 될지언정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면 기꺼이 드리겠다는 의지표명입니다. 마치 자식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부모와 같습니다. 이그나티우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제를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저의 (피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쏟아지게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저를 위해 하지 마십시오. 제단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사랑의 합창단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 노래를 불러드리십시오.”
나가면서
오늘 본문은 마치 웅장한 합창과 같습니다. 바울은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다음, 흠 없는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빛들로 나타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헌신을 기쁨을 표시하며, 함께 기뻐하자고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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