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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1-8절 누구에게 보이고 싶은가?

샤마임 2021.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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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1-8절 누구에게 보이고 싶은가?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 마태복음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마태복음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마태복음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마태복음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마태복음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강해

“사람에게 보이려고”

목적이며 저의(底意)를 말합니다. 그가 행동하고, 선을 보이고, 구제하는 이유와 목적이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안중(眼中)에 두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평판과 사람의 칭찬을 기대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형식은 기도하지만, 그는 기도하는 자가 아닙니다. 기도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은 기도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입니다.

 

삶은 영적 예배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삶은 결국 사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결국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2절)는 사람과 동일시됩니다. 이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인 동시에 자신을 신으로 섬기려는 악마적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시작한 수많은 일들이 자신을 신으로 섬기려는 악의로 변질되어 갈 수 있습니다.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겸손은 일용할 양식처럼 매일, 매시에 채워져야 하는 영적 양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인듯하지만 자신을 숭배했던 가인의 제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손은 귀중한 손이고, 대표이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손입니다. 오른손은 몸의 전체를 상징하는 제유법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리 없습니다. 모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기억하고, 소중한 것을 담아둔다. 우리는 매일 아침 식사 반찬을 기억하지 못하고, 매일 오가는 출근길을 굳이 찾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이며 평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른다는 것은 그들의 섬김과 사랑이 몸에 배어 있고, 스스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제가 당연하고, 도와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도왔고, 언제나 도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섬김과 구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기억하시며 갚으실 것입니다.(4절) 빌린 돈을 기억하고, 밀려준 돈은 잊으라는 속담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섬겼다면 잊어버리십시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면 기억하지 마십시오. 그럼 하나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기억보다 하나님의 기억이 더 선명하며, 인간이 알아주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 더욱 소중합니다.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외식(外飾)은 바깥을 꾸미는 것입니다. 화장하고 옷을 입는 모든 행위는 외식입니다. 죄가 아니나 과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외식이 가식(假飾)으로 전이된다면 병적으로 심각한 상태가 됩니다. 외식이 소극적 꾸밈이라면 가식은 적극적 꾸밈입니다. 가식이 치명적인 이유는 악의적으로 꾸미는 것입니다. 악한 의도로 가지고 접근하면서 선한 모습으로 속입니다. 그것은 가짜이며 거짓입니다. 기도라는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서서 기도하는 관습은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의 형태이다. 고대 성전은 현대의 교회의 같은 의자가 있는 곳이 아니다. 극히 일부는 제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 서서 기도했다. 그런데 종종 자신의 경건함을 자랑하기 위해 많은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서서(잘 보이도록) 기도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은 기도를 많이하는 사람임을 자랑했다.

  • 마가복음 11장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8장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통곡의 벽에 서서 기도하는 유대인


유독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건이 몸에 배어있어야 함에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은 거짓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경건을 가장한 화려한 모습과 겸손을 가장한 타인에 대한 비방으로 자신과 타인을 속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을 멀리 하십시오. 수많은 경건한 모임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훈장처럼 달린 수많은 새벽기도 상과 금요 기도회 개근상들은 자신을 속이는 기만행위입니다. 행사는 경건이 아닙니다. 기도 모임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사랑하면 오래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오래 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이 질은 아닙니다. 많은 말의 양이 깊은 기도의 질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향유하는 것이며, 오랜 시간은 친밀함의 표식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많은 양을 했으니 기도를 당연히 들어주어야 한다는 교만함이 깔려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께서 아’(8절)신다고 충고하십니다. 기도는 나의 사정을 아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아룀 속에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관계와, 이미 아심의 전능성과 응답하심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유(享有)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자들은 자신이 뭘 기도하는지도 모르고 오직 많은 기도의 양이 곧 응답의 비결이라 생각을 오류를 범합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많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많이 기도하려하지 말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십니다.(1절) 하나님은 갚으십니다.(4절) 하나님은 보시고 들으십니다.(6절)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진실함과 정직함이 아닐까요? 억지스러움과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께서 하실 것을 믿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을 정경학적 관점에서 주해하고 강해한 것입니다. 기존의 글을 수정 보완하고 있어서 미완성의 글입니다. 시간되는대로 계속하여 수정해 나갑니다. 마태복음 연구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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