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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의 족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샤마임 2020.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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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의 족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 1:1은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ησοΧριστουοΔαυεδ υοῦ Ἀβραάμ.

 

대부분의 사본들은 동일한 헬라어를 사용한다. Βίβλος는 그냥 책이며, 영어로 Book로 번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굳이 왜 한글성경은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이유는 γενέσεως 때문이다. γενέσεως세대를 뜻하는 단어이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of [the] genealogy’로 번역한다. 1:18에서 동일한 단어가 탄생측 출생으로 번역했다. 한 마디로 출생에 관해 기록한 책인 것이다. 그럼 족보라는 단어가 있지 않는가. 그렇다. 족보가 있는데 왜 굳이 세계로 번역했는지 번역자들에게 묻고 싶다.

 

[개역한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공동번역]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새번역]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새번역] 이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족보 이야기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다. 부디 다음에 번역할 때는 세계가 아니라 족보나 계보로 번역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 어쨌든 마태복음에 나타난 족보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일단 마태복음에 소개된 사람들을 정리해 보자.

 

마태는 이스라엘의 기원이 되는 아브라함과 왕의 상징인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 모두 14대로 끊는다. 그런데 3대에 걸쳐 14대를 말하지만 엄밀하게 14대가 아니다. 아래를 표를 보자.

마태복음족보마태복음 1장 족보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난 족보는 특이한 점이 몇 가지 보인다.

 

. 낳음을 입지 않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소개할 때 조상이 없다. 마태는 곧장 아브라함을 가장 머리에 둠으로 아브라함 이전 사람들에 대해 단절을 선언한다. 이러한 단절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족보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은 시작을 의미한다. 예수 역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 두 번 언급된 다윗

 

1세대와 2세대 사이에 족보에 다윗이 두 번에 걸쳐 마무리와 시작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다윗은 족보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중심인물이다. 다윗은 히브리어 수가로 14이다. [이 부분은 하단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다윗의 두 번째 세대의 시작으로 소개되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존재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구약뿐 아니라 제2성전기 문헌들은 왕은 다윗이며, 정통성을 가진 왕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마카비 왕조가 정통성이 부정되는 이유는 그들은 전통 대제사장 가문인 사독의 후손이 아니었으며, 왕으로서도 다윗의 후손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게 거짓된 왕 또는 가짜 왕으로 무시당했다. 특히 쿰란 문헌들은 더욱 거세게 마카비와 그 후손들의 왕됨을 저항한다. 마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를 얼마나 유대인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아래의 구절들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복음 27: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마태복음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마가복음 15: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요한복음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 두 번의 특이한 소개법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은 다른 형제들을 소개하는데 어떤 사람은 소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다’(2)고 소개한다. 11절에서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소개한다. 이러한 서술은 어떤 기준을 적용한 것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소개법은 상황적으로 비슷하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포로적 상황 속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마태는 요시야를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갈 때’(11)로 포로적 상황을 설명한다. 포로 상황으로의 변화는 자손들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과 연관된다.

 

. 세 명의 이방 여인 그리고 마리아

 

세 번째는 세 명의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다윗은 밧세바가 아닌 우리의 아내’(6)에서 솔로몬을 낳는다. 분명하게 불륜을 폭로하는 대목이다. ‘유다는 다말에게서’(3)살몬은 라합에게서’(5)와는 분명히 다른 표현이다. 다윗을 유독 주목하고 있다. 다말과 라합은 분명히 이방여인이다. 하지만 밧세바는 정확하게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아가 헷사람인 것을 감안할 때 이방여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성경은 매우 빈번하게 우리아를 헷사람으로 소개한다. 다말과 라합은 외부에서 들어온 이방여인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내는 이미 이스라엘 안에 들어와 있는 충직한 신하의 아내이다. 사무엘하에 소개되는 우리아는 다윗의 철저한 신복이며, 충성된 군인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철저히 헌신했던 우리아를 살해한다

 

. 계대의 나눔 방식

 

계대를 나눌 때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까지 한 세대를 나눈다. 두 번째 세대는 다윗부터 바벨론포로까지 나눈다. 세 번째 세대는 바벨론포로부터 예수까지로 나눈다. 아브라함을 포로기적 상황으로 본다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포로에서 왕까지의 기록이다. 반대로 다윗 이후는 왕에서 다시 포로기로의 도태이다. 바벨론 포로 이후의 역사는 마카비 가족의 항거로 인한 하스모니안 왕조의 탄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불완전하며 포로기에 속한다. 포로기적 상황은 예수를 다시 왕으로 소개하면서 새 희망으로 연결 시킨다. 마이클 그린의 족보 설명을 들어보자.

 

유대인들이 다윗의 후손 예수를 지향했던 것처럼, 다윗은 이스라엘의 희망과 발전을 대표하는 최고점이었고, 바벨론 포로 사건은 이스라엘의운명과 그들의 좌절된 희망, 왕위 계열의 종결을 대표하는 최하점이었다. 하지만 그 최하점 역시 메시아 예수님과 그분의 백성을 지향하며, 그들 안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회복되고 그 약속들이 성취될 것이다.

 

만약 마이클 그린의 주장이 옳다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작과 탄생 그리고 예수로 재편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유대인들의 족보와 714]

 

유대인들은 족보를 77의 배수를 사용하여 기록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0:2-5에 등장하는 야베 자손들은 14명인데 7명의 아들과 7명의 손자들로 소개된다. 노아 후손들에 대한 족보 역시 70이란 숫자에 맞추어져 있다. 노아를 통해 생겨나는 열방의 숫자는 70이다. 또한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과 가족의 전체는 70명이다. 구약에서 7과 관련된 숫자 상징은 완전이며, 전체를 뜻한다. 147의 배수로 완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마태가 의도적으로 다윗의 수가로 14를 배열했다면 예수는 곧 새로운 다윗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문제는 마태복음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헬라어는 14와 아무런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만약 히브리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기에는 약간의 의혹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도날드 헤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석가들 중에는 히브리어로 다윗이라는 이름에 포함된 철자들이 나타내는 수치에 주목하여, 마태가 자신의 저작 의도에서 다윗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이 수치들을 염두에 두고 이 족보를 기록했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복음서가 어디까지나 헬라어로 기록된 이상,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그와 같은 히브리적 수비학을 독자들이 간파할 수 있었으리라고 믿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히브리어로 다윗이라는 이름의 철자들이 나타내는 수치들의 합이 14라는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헬라어로 기록된 본문에서는 아무런 결정요인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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