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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롬 1:18-23

샤마임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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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 (롬 1:18-23)

진리를 막는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1:18)

로마서 1장 18절은 바울이 복음을 설명한 직후, 왜 복음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이 구원이 필요한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심각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18). 여기서 '진노'(ὀργὴ, 오르게)는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기초한 공의의 반응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는 단지 윤리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며, 그 반역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부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τῶν τὴν ἀλήθειαν ἐν ἀδικίᾳ κατεχόντων, 톤 테 알레쎄이안 엔 아디키아 카테콘톤)이라는 표현입니다. '막는다'는 '카테코(κατέχω)'는 억누르다, 억제하다의 의미로, 본래 드러나야 할 진리를 의도적으로 억누른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영적 실재를 포함합니다. 인간은 그 진리를 억누르고 자신의 욕망을 우상으로 삼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에 대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거절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응답입니다.

 

계시된 하나님, 그러나 외면한 인간 (1:19-20)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9). 이 구절에서 '알 만한 것'(τὸ γνωστὸν, 토 그노스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 곧 일반 계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양심을 통해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보이셨느니라'(ἐφανέρωσεν, 에파네로센)는 단순한 힌트나 암시가 아니라, 분명하게 드러내셨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20절은 이를 더욱 구체화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여기서 바울은 자연을 통한 일반 계시의 범위와 깊이를 강조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ἀόρατα, 아오라타)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말하며, '능력'(δύναμις, 뒤나미스)은 창조와 유지,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신성'(θειότης, 테이오테스)은 신적인 본질 혹은 존재의 위엄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속성을 피조세계에 분명히(καθορᾶται, 카토라타이) 보여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단지 자연을 관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어야' 하는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계시를 외면하고 부정한 자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떤 자기변명도 허용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계시된 진리 앞에 서 있으며, 그 진리를 외면함으로 스스로 정죄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꾼 자들 (1:21-23)

바울은 이어서 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지를 더욱 심층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1:21).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γνόντες, 그논테스), 그 지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화롭게 하다'(δοξάζω, 독사조)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경배와 존귀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도 단순한 예절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깊은 교만의 표현입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ἐματαιώθησαν, 에마타이오쎄산)는 말은 헛되고 공허한 철학과 자기 중심적 사유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한 후, 인간 스스로 의미를 창출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암시합니다. '미련한 마음'(ἄσυνος καρδία, 아쉬노스 카르디아)은 단순히 지적 무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분별력을 상실한 마음을 뜻하며, 그 결과 '어두워졌다'(ἐσκοτίσθη, 에스코티스쎄)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삶의 영적 암흑을 표현합니다.

 

22절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보여줍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지혜 있다고 여긴 인간이 오히려 어리석어졌다는 이 표현은 지적 교만과 영적 실명을 풍자적으로 드러냅니다. '어리석게 되다'(ἐμωράνθησαν, 에모란쎄산)는 단순히 똑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떠난 상태에서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착각하는 영적 어둠의 깊이를 가리킵니다. 이 어리석음은 곧 이어지는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3). 여기에 나타나는 '바꾸었다'(ἤλλαξαν, 엘락산)는 단어는ㅇ 원래의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다는 뜻이며, 이는 단순한 종교적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의도적 전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경배하지 않고, 오히려 피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썩지 아니하는'(ἄφθαρτος, 아프타르토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φθαρτός, 프타르토스) 피조물로 바꾼 것은 본질적으로 죄의 본성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선택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떠난 사건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인간의 우상숭배는 단지 이방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나은 판단자라고 여기는 교만의 표현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진노는 자의적이지 않고, 계시를 거부하고 불의를 조장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정당한 반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썩어질 것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이 죄는 외면적 행위 이전에 마음의 어둠과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이 절실한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억누르고,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인간은 결국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된 상태이며, 구속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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