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성 바질의 성령에 관하여<De Spiritu Sancto>
성 바질의 성령에 관하여
De Spiritu Sancto
1. 바질의 생애와 배경
바실리우스는 짧고 강력한 삶을 삶았던 교부입니다. 교회가 분열로 인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시대적으로 어지러웠지만 정통 교리 확립에 큰 공을 세웁니다. 한 명은 지난주에 본 <모세의 생애>를 기록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이고, 다른 한 명은 나지안조스 그레고리우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나지안조스의 친구이자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친형인 가이사랴의 바실(Basil, 이후 바실리우스로 표기)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납니다. 바실리우스는 탁월한 교회 행정가였으며, 동방의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는 생전부터 ‘대(大) 바실리우스’로 불렸습니다. 50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살아생전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교부입니다. 고대 교부 중에서 대(Magnus)가 붙은 교부는 바실리우스가 유일합니다.
329년 경 열 남매 중에서 장남으로 갑바도기아 수도인 가이사랴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고전 학문을 배우고, 할머니인 마크리나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배웁니다. 바실리우스의 외가 쪽은 삼대째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엠멜리아는 후대에 ‘성녀’의 칭호를 받을 만큼 탁월한 믿음의 여성이었습니다. 가이사랴 수사학 학교에서 수학 하는 동안 평생 친구이자 동료인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를 만납니다. 집안이 부유했던 덕택에 당대에 유명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바실리우스의 아버지는 편협하지 않은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다양한 공부를 하도록 지도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아테네로 유학을 떠나 프로하이레시오스와 히메리오스의 강의를 듣게 됩니다. 이곳에서 훗날 황제가 되는 율리아누스를 알게 되고 나지안조스를 다시 만난다. 히메리오스는 비두니아 출신으로 수학자이면서 밀교의 신자였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이사랴에서 수사학을 가르치지만 금욕적 생활을 위해 그만두게 됩니다. 아바도 바실리우스는 탁월한 실력 덕분에 이웃 지방에서도 그의 명성을 듣고 초빙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독서직을 받고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합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그에게 친구들이 찾아와 가이사랴로 돌아와 달라고 강청합니다. 당시 교회는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니케아파와 유사 본질을 주장하는 아리우스 파로 나뉜 상태였습니다. 결국 364년 감독으로 안수를 받습니다. 그러나 감독이 되면서 그는 평안할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학을 거의 하지 못한 유세비우스가 주교로 있어서 대신해 교회를 돌봤습니다. 376년 본도와 갑바도기아를 다스리는 데모스테네스 총독은 아리우스 파의 부추김으로 정통파 감독들을 축출하지만 대표 격인 바실리우스에게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기독론과 더불어 당대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성령론’이었습니다. 애굽 수도원 생활을 할 때 알게 지낸 세바스테 감독이었던 에우스타티오스와 대적하게 됩니다. 에우스타티오스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3년 바실리우스와 완전히 결발한 에우스타티오스는 바실리우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나 삼신론자로 말했습니다. 결국 바실리우스는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고 삼위일체를 확고히 하기 위해 375년 <성령론>을 저술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지방 감독들에게 에우스타티오스와 결별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의 듣지 않았습니다. 금욕적 생활로 인해 바실리우스는 늘 몸이 허약했습니다. 결국 379년 1월 1일 만 50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자신의 뒤를 이어 큰 업적을 남기게 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를 사망하기 4개월 전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 되게 하였습니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는 바실리우스와 뜻을 같이하여 삼위일체 교회가 뿌리내리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2. 구조와 내용
바실리우스의 성령론은 모두 30장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 책은 <에우노미오스에 대한 반론>과 더불어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후에 밀라노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는 이 책을 참고로 하여 자신의 <성령론>을 저술합니다. 바실리우스의 성령론은 현재의 삼위일체적 성령론과 거의 일치하지만 ‘동일 본질’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열 일변도로였던 교회가 일치시키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며, 과도하게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으려는 마음인 것으로 보입니다.
서언 1장
서론 2-9장
본론 10-29장
결어 30장
3. 내용 요약
서언 1장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직업을 배우는 것과 같다. 도제들이 그들의 지식을 축척할 절호의 기회를 경멸하지 않게 상황을 제공받으면서 조금씩 경험하며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아들과 성령과 함께 아버지께 영광으로 끝낸다. 때로는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 영광이라 한다.
서론 2-9장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본질상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옛 올무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고전 8:6절 말씀에 나타난 전치사들이 본질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누구로부터의 표현은 ‘누구를 통해서’와 다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다 '고 말한다. 이것은 교묘한 속임수다. 이들은 이교의 철학이 사유하는 방식으로 성령을 사유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느니(고전 8:6) 성자와 성령도 그에 따른 것이라 믿어 버린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한다.(고전 1:30) 이처럼, 너희가 성령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다른 위격인 것처럼 성령도 다른 위격이 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고 한다.(고후 1:1)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한다.(딤후 1:14) 동일한 사도직인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면 서로는 동일한 본성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의 영이며, 성부로부터 비롯된 진리의 영이요, 의의 영이며 자발적인 영이다. 이 모두를 포괄하는 적절한 명칭은 거룩한 영이다. 이는 초월적이며, 순수하게 비물질적이며, 인격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데 가장 적합한 이름이다.”
본론 10-29장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을 적절치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며(행 5:2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따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우를 공격한다.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는 듯하지만 ‘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다.’ 그들은 교부들의 구전을 무시한다. 구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부인하면 이단자들이다. 주의 이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경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으라 하신다.(행 1:5)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믿는 것처럼 성령을 믿는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분리되지 않고 분열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하게 경배되어야 한다.
성령도 주님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주는 영이시다.(고후 3:17) 또한 영이신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말한다.(고후 3:18)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고전 3:16)이러한 성경의 명백한 증거들은 성령이 주 하나님과 주 예수처럼 주 성령님인 것이다.
결어 30장
아리안 주의가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성령을 왜곡시킴으로 신앙을 파선시키고 있다. 물속 암초와 같아 잘 보이지 않지만 부딪히는 배는 좌초당한다. 수많은 적들이 있지만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성령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지식을 주시는 분이다.
4. 나가면서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는 단지 ‘성령을 믿습니다’의 모호한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이러한 모호함은 불가피한 논쟁을 가져오게 했고, 아리안 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러한 삼위일체 논쟁, 특히 ‘성령론의 논쟁을 거의 마무리 짓습니다. 이들의 뒤를 이은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성령은 하나님이시다’고 선언하며,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라는 책을 통해 이점을 명백하게 선언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정통’은 시간이 흘러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정통신앙 속에는 교부들이 흘린 순교의 피와 피를 말리는 논쟁, 황제와 이단들의 협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 교리를 걸어온 길의 풍경을 담아내려고 한다면 지구의 모든 종이로 기록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바실리우스는 거룩한 삶과 정통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그러한 교리를 소홀히 대하지 않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삶으로 진리를 살아내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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