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식물] 돌무화과나무, 뽕나무(sycamore-fig)
[성경의 식물] 돌무화과나무, 뽕나무(sycamore-fig)
성경 속에 등장하는 돌무화 나무이다. 돌무화과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기존의 무화과는 종이 다르다. 하지만 열매는 무화과 거의 흡사하여 돌무화과나무로 불린다.
1. 용어
무화과열매와 닮아 돌무화과로 불리지만 뽕나무과에 속한다. 학명은 ‘Ficus sycomorus’이다. 히브리어로 ‘시크마’이다. 영어로 ‘sycamore’로 번역된다. 그런데 동일한 이름의 북아메리카 sycamore마는 플라타너스의 일종이며, 근동의 돌무화과나무인 sycamore와는 완전히 다른 나무이다.
북아메리카의 시크마. 플라타너스의 일종이다.
여리고에 예수님을 보고 싶어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가 바로 돌무화과나무이다. 한국에서 보는 뽕나무보다는 무화과나무에 더 가깝다. 하지만 엄연하게 뽕나무과에 속한 나무이다. 무화과나무가 3-5m가 자란다면, 돌무화과나무는 10m가 넘게 자라기도 한다. 줄기도 굵고 크다. 중앙아프리카가 원산지이며, 청동기가 지나는 어느 시점에서 근동지방에 전파된 듯하다. 무화과보다 덜 달고 더 작다. 하지만 일 년에 6회에 걸쳐 열매를 맺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중요한 열매 중의 하나였다.
여리고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삭개오가 올라갔다는 그 뽕나무와 같은 종이다. 성지순례를 떠나면 인도하는 곳이다.
무화과나무가 잎이 매우 큰 반면, 돌무화과 나무는 좀 더 작고 둥글다. 긴 타원형의 잎을 가지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뻗어 나가기 때문에 넓은 그늘을 만들어 준다. 무화과나무는 대체로 가치가 낮기 때문에 길가에 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돌무화과 나무는 무화과나무보다 더 가치가 낮기 때문에 대부분 길가에 심겨졌다.
열매가 보이기 시작하면 농부는 못 등으로 열매에 흠집을 내 안에 있는 에틸렌 가스를 방출시킨다. 이렇게 하면 열매는 더욱 커지고 맛도 좋아진다. 3-8배의 효과를 낸다고 하니 다들 돌감람나무 열매 찌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그대로두면 열매는 손톱보다 좀 더 큰 정도의 작은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기생벌이 열매 안에 알을 낳아 망치게 된다. 그래서 재배자들은 틈이 나는 대로 열매를 송곳 등으로 찌르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아모스는 자신이 원래 선지자가 아니라 목동이고 무화과나무를 관리하는 자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아모스가 천한 직업을 가진 자이고, 돌무화과나무에 구멍을 내며 부자들의 무화과를 관리해주는 일을 했을 것으로 본다.
- 암 7:14-15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돌무화과나무의 열매와 잘려진 모습
이집트 돌무화과 열매
일반 무화과와 잘려진 모습. 일반 무화과는 크고 당도도 훨씬 높아 가격도 비싸다.
이집트 토트모스2세의 무덤 벽화에도 돌무화과나무를 찌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줄기는 파라오의 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돌무화과나무는 이집트에서 중요한 과수의 한 종류였으며, 국가에서 직접 관리재배하는 나무였다. 아마 노예나 종들에게 무화과 열매를 찌르는 일을 맡겼을 것이다. 다윗도 세펠라 지역에 돌무화과나무 과수원을 만들고 관리하도록 지시한 것을 볼 때,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에 요긴한 식용식수였을 것이다.
이시스와 같은 신들이 종종 나무의 신으로 등장한다. 돌무화과나무는 이집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나무는 사람이 태어난 여성의 모태와 같은 곳이다. 생명은 나무로부터 나오는 진액을 받음으로 유지된다. 학자들은 파라오의 관을 돌무화과나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먼저 내구성이 탁월하며, 여성신의 의인화된 나무이기 때문으로 본다. 관을 여성을 상징하는 돌무화과무로 만듦으로 다시 여성의 자궁으로 들어가 부활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러한 부활 사상에는 바알 신화에도 나타난다. 바알은 죽지만 아세라가 바알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땅으로 내려간다. 아세라가 대부분 나무로 깍아 만들었다는 점도 유의해 볼만한다. [성경의 신-아세라]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는 헬라 신화에도 수메르 신화에도 거의 비슷하게 등장한다.
아래의 사진을 돌무화과나무로 만들어진 파라오의 관[사진출처 위키백과]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을 보면 돌무화과나무로 관을 만든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만큼 내구성이 뛰어나고 시신을 안전하게 보관했던 것이다. 목재가 귀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무화과나무는 7년이면 사용할 수 있고, 귀한 것은 아니지만 내구성이 강해 일반 서민들에게는 요긴한 목재였다.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뽕나무)를 '들보'로 예로 든 것으로 보면 확실히 흔하게 사용된 나무임이 분명하다.
[묵상]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누구나 명예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앞에서는 굴복하나 뒤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존재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실존 사이는 멀기만 합니다. 오늘도 삭개오는 주판알을 튕기며 돈을 계산합니다. 아직 세금을 내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 협박하고 무엇이라도 빼앗아 옵니다. 그들의 빈궁한 삶에 눈감고, 간절한 눈빛에 고개를 돌리며, 통곡하는 소리에 귀를 막습니다. 처음 세리를 시작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 할 것이고, 나도 나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합리성도 치밀하고 단단해졌습니다. 잠깐, 아주 잠깐 그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면 적지 않은 수입이 생깁니다. 그렇게 재산을 늘어가고, 권력도 강해져 갑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유한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과 대화도하고 식사도 한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안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창녀들과 세리들과도 함께 식사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말은 한 가족이 된다는 말이며,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 준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흥분했고, 율법을 조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 항의했고, 어떤 날은 예수님께 직접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여리고로 찾아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예수님을 둘러쌓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끌림’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차마 예수님을 입을 담을 수 없었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멀리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침 길 곁에 수백 년 전에 조상들이 심어놓은 돌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돌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보다 못한 가치 없고 보잘것없는 열매였습니다. 작고 볼품없고, 맛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식량이 그리 많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돌 무화과나무는 식량을 위한 중요한 나무였습니다. 그곳에서 열리는 돌 무화과는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었고,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구황(救荒)음식이었습니다. 바로 그 돌무화과나무에 삭개오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저 멀리 계시던 예수님이 점점 가까이 옵니다. 그냥 지나쳐 갈 겁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 아래 멈추어 섰습니다. 고개를 드시더니 삭개오를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려오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삭개오는 내려가야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키가 작아 그곳에 올라간 것을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키가 작으니 이곳에라도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열등감, 고독, 소외, 배척당함. 이 모든 것을 핑계 삼아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등에 올라타 발로 밟는 것을 합리화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서 내려오라’하십니다. 그곳은 돌무화과나무입니다. 길가에 심겨져 그다지 가치 없고 별 볼일 없는 나무이지만 가난한 자들의 생존을 위한 구황 음식인 돌무화과나무를 훼손하는 것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의 합리화를 ‘신앙의 도약’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어하는 갈망,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줄지도 모를 예수라는 그 사람을 향한 삭개오의 몸부림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내려오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오늘 너희 집에 거하겠다’ 하십니다. 이제 돌무화과나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존재의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비본질의 껍질을 순식간에 깨부수고 본질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냈습니다. 삭개오는 즉각 반응했습니다. 급히 내려왔고, 함께 자신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립니다.
“저기 봐라.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의 집에 거한다.”
삭개오도 수군거림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가면서 흥분된 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주고, 만약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았다면 네 배를 갚겠다고 말합니다. 삭개오는 이미 내려와 있습니다. 그는 변했고, 또한 더 변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가난한 자들의 양식인 돌무화과나무를 짓밟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 문헌과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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